KNCC

193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갈등과 분열

입력 : 2026-06-27 13:45:04 수정 : 2026-06-28 11:51:58

인쇄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당연히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내적으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아빙돈 주석사건’으로 인하여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 1933년 장로교에서 공의회에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공의회의 회원을 교파 단체로만 할 것이며, 각 교파 단체의 대표를 최다 5인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서 공의회는 1933년 제10회 총회에서 논의하였는데 당시 규칙부에서는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규측부위원 보고

본부결의상항을 여좌히 보고함

一, 본부조직, 부장 강병주, 서기 라시산

二, 장로회 총회에서 제의한 본 공의회를 교파단체로 하자는 것은, 세계련합공의회규측이 비교파 단체로 가입케 한것이오며 우리 공의회도 세계련합공의회와 관계를 맷는 이상 비교파 단체를 가입한 것이 임이 잘된줄 아오며

三, 장로회 총회에서 규측 제7조를 개정하야 대표자수를 5인으로 축소하자는 것은 5인만으로는 너무나 소수인고로 장감양교파에서는 각 10인식으로 하고 각 선교회의 각 단체에서는 반수를 감하되 3인은 2인으로하고 1인은 그냥 1인 그대로 함이 가한줄 아나이다.

 

 

이상의 보고 역시 본 규칙이 통과되기까지 1년간 유안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장로회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신들의 제안이 부결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곧바로 1934년 9월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그것을 보고하였다.

 

공의회는 1934년 제11회 총회에서 1년간 유안되었던 규칙부 보고를 채용하고 가결하였으며, 사실상 장로교의 제안이 부결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는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평북로회장의 련합공의회 해소건은 기각하고 평서로회장의 헌의한 련합공의회 탈퇴건에 대하야는 본 총회로서는 탈퇴함이 가하오며”라고 결의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4회 회의록】 52쪽

 

이로써 1934년 제11회 총회에 다섯 명의 대표만 파송했던 장로교는 1935년 이후에는 대표를 아예 보내지 않았다.

 

김인서는 장로교회의 연합공의회 탈퇴를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유일한 연합기관의 운명이 다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연합공의회가 해소될 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예상하며 통탄했다.

 

“직접영향은 公級會 경영중인 동경교회가 분열될 것이오 주일학교연합회도 장차 분립될지 모을것이며 장ㆍ감양파간의 파쟁은 일층노골화할 것이다. 연합파열의 책임이 장로교에 잇는가 감리교회에 잇는가 장ㆍ감양교회 속에 숨어 있는 政黨的某團某會의 ᄲᅮ리 깁흔 파쟁에서 양조(釀造)되는가 그 책임이 장로교회에 잇든지 감리교에 잇든지 某團係某會人의게 잇든지 불문하고 오십주년기념으로 장ㆍ감연합공의회를 ᄭᅢ여버린다면 조선 사람은 합할 수 없는 못된 민족이란 것을 천하 교회에 증명하고도 남음이 잇슬 것이다.”

 

장로교 총회의 탈퇴 결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합공의회를 교파들만의 모임으로 하기를 원했으며, 나아가 장로교총회의 규모에 비해 총대수가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급기야 연합공의회의 탈퇴라는 극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연합운동의 위기와 더불어 교파주의가 극성을 부린 것이다.

 

이후에 장로교에서는 1936년 제25회 장로교 총회에서 다시 공의회에 가입하자는 헌의가 있었으나 1년간 유안하였고, 1937년 제26회 장로교 총회에서 “작년에 유안하였던 연합공의회에 재가입건은 총회로써 불필요로 인정하고 탈퇴한지 불과 2년만에 다시 가입할수 없사오며(양주삼 씨의 설명을 듣고 토의한 후 가입하지 않기로 가결함)”라고 결정하면서 재가입의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6회 회의록】 61쪽

 

이후에도 공의회측은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일제의 압력에 저항해도 모자를 판에 서로 자신의 주장만 고수하다가 해산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