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CC

백년의 발자취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 조직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 조직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에큐메니칼 운동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미북감리회 매클레이 선교사의 방한(1884)과 미북장로회 알렌 선교사의 미공사관 공의 자격 입국(1884) 이래, 안수 받은 선교사인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 미북감리회의 아펜젤러가 내한(1885)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호주장로회(1889), 영국성공회(1890), 미남장로회(1892), 미남감리회(1895), 캐나다장로회(1898)가 순차적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성결교회로 발전하는 동양선교회(1907)를 비롯해 구세군(1908), 오순절교회(1928), 복음교회(1935) 등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침례교는 1895년 미국 침례교 계통의 선교단체인 엘라딩 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충남 공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선교회가 1901년 사업을 중단하게 되자, 1889년부터 한국 순회선교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캐나다인 독립선교사 펜윅이 그 조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보다 체계적인 선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라는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수립하게 되는데, 바로 이 교회가 오늘 한국 침례교회의 모체가 된다. 선교 초기, 이러한 다국적, 다교파의 기독교 선교지형은 선교현장에서의 경쟁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내 불필요한 경쟁을 극복하고 협력과 일치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자는 각성과 공감이 전향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각 교파 선교회 간의 제휴와 협력, 일치의 노력 각 교파 선교회 간의 제휴와 협력, 일치의 노력은 장로교 선교회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 1889년 미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간에 ‘장로교선교부연합공의회’(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를 시작으로, 1892년 미남장로회 한국선교 개시 이후인 1893년을 기해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 선교부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조직되었다. 이후 1898년, 네 개의 내한선교회(미국 남북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가 참여한 ‘장로교선교부공의회’가 조직되었으며, 1901년부터는 한국인 교회지도자들도 공의회 회원으로 참여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1901-1907)가 시작되었다. [장로교의 공의회 시대는 1893년부터 1900년까지의 ‘선교사공의회 시기’(제1기), 1901년부터 1906년까지의 ‘합동공의회 시기’(제2기)로 나뉜다, 차재명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 조선기독교창문사, 1928.145.] 이 조직은 1907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단일조직인 독노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치리적 최고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네 개 장로회 선교부의 연합과 일치는 이후 전개되는 한국 기독교 연합운동의 기초를 제공했다. ☞ 장로회선교사공의회 소속 선교사들이 ‘하나의 한국교회’ 조직을 목적으로 1897년 서울에서 선교사 회의를 열었다. [출처 : 기독공보] 이렇게 장로회 선교부들간의 일치와 협력이 전개되는 동안, 비록 장로교와 감리교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교파를 넘어선 선교협력과 일치의 모색도 병행되었다.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의 선교부가 장로회 네 개 선교부와 연합사업에 동참하면서 1905년 3월 19일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단순한 협의체를 넘어서서 교회의 완전한 통합, 단일교회 수립을 목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일치와 단일교회 수립을 향한 노력은 교리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차원, 바로 각 교파 본국 선교본부의 비협조, 일부 내한선교사들의 반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여력과 열의 부족 등으로 인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출범하는 1912년, 공의체제(General Council)에서 연합체(Federal Council)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는 기독교 선교의 효율성과 수월성을 극대화하며 교파 간 연합을 진작키 위해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며, 선교지역분할, 성서번역(성서공회), 문서출판(기독교서회), 연합 찬송가와 정기간행물 발간(『기독신보』, The Korea Mission Field), 교육과 으료분야의 협력(숭실학교, 세브란스병원 등) 등을 통해 각 교파 기독교의 역량을 통합해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복음 선교의 수준과 영향력을 한층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참고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8-11]
2026-06-27 13:45:04
백년의 발자취1918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결성
1918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결성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는 한국 기독교의 첫 교파연합기구였다. 그러나 이는 선교사들만의 협의체였다. 1916년 본 공의회에서는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의 참여가 필요함을 결의했고, 1917년 6월 21일 평양에서 장로회 대표 네 명, 남북감리회 대표 일곱 명, 이상 11인의 위원이 모여 장ㆍ감 협의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이듬해 3월 26일 경성YMCA회관에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The Korean Church Federal Council, KCFC)가 창립되었다. 본 창립 협의회에서 회장 김필수 목사(장로교), 부회장 노블 선교사(북감리회), 서기 오기선 목사(남감리회), 부서기 함태영 목사(장로교)가 임명되었다. (『朝鮮耶蘇敎長監聯合協議會 第一回會錄』, 1918.1.) 본 협의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북감리회 조선연회’, ‘남감리회 조선연회’ 이상 세 개의 교파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본 협의회의 창립 목적과 권한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정신을 증진케 하며 친목하는 정의(情誼)를 돈독케 함. 양 교회가 홀로 행하기 어려운(難) 일이 있는 경우에는 합력하여 행하기를 힘써 도모함. 두 교회가 교역상 경력과 지식을 서로 교환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확장함에 도움이 있게 함.” “본 회는 두 교회의 신경과 정치와 예배모범 등 일에 대하여서는 관섭치 못함.”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는 기존의 선교사 중심의 선교부공의회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개신교의 두 교파인 장로회와 감리회가 교회차원에서 조직한 첫 협의체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참고로 1918년, 제1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회의록 중 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서언은 아래와 같다. 緖言(셔언) 主(쥬) 그리스도의 祝福(축복)ᄒᆞ심이 今日(금일)조선교회에 와셔 成就(성ᄎᆔ)됨을 眞誠感謝(진셩감샤)ᄒᆞ노라 一天父(텬부)의 衆子(붓ᄋᆞ)를 一救主(구쥬)의 肢軆(지테)로써 敎派(교파)를 分立(분립)ᄒᆞᆷ은 但時機(다만시긔)와 場所(쟝소)에 依(의)하야 形式(형식)에 不過(불과)ᄒᆞ거ᄂᆞᆯ ᄯᅡ라셔 精神界(정신계)ᄭᆞ지 影響(영향)이 혹 잇슨즉 瓦相間(서로ᄉᆞ이)에 所感(소감)이 不無(업지못)ᄒᆞ더니 現今(현금)에 長老監理兩敎會(쟝로감리량교회)가 此(이)ᄅᆞᆯ 顧念(고념)ᄒᆞ야 一軆的聯合機關(톄뎍련합긔관)을 組織(조직)ᄒᆞ니 卽張監聯合協議會(곳쟝감련합협의회)가 是也(이거시)라 主(쥬)의 祝禱(츅도) 「彼等(뎌희)로 ᄒᆞ야곰 다 一(하나)이 되게ᄒᆞ샤 父(아바지)ᄭᅴ셔 我內(내안)에게시고 我(내)가 父(아바지) 內」(안)에 在(잇)ᄂᆞᆫ 것 ᄀᆞᆺ치 彼等(뎌희)도 我等(우리)의 內(안)에 在(잇)게ᄒᆞ샤 世上(셰상)이 父(아바지)ᄭᅴ셔 我(나)ᄅᆞᆯ ᄂᆡ신거슬 信(밋)게 ᄒᆞᄋᆞᆸ소셔」(요 17장 廿一)ᄒᆞ신 此(이) 聖訓(셩훈)의 恩惠(은혜)와 平康(평강)이 本會中(본회즁)에 恒在(항샹잇슬지)어다. 아멘. 1918년 5월 京城(경성)에서 金弼秀(김필수) 【참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10-11
2026-06-27 13:45:04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하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 창립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창설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독자적인 연합기구인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병존했다. 장감연합협의회에서는 1922년 10월 26일 제6회 회의에서 두 연합기구의 통합 건에 대해 의논했으며, 이듬해 3월 장감연합협의회를 해산하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924년 9월 24일,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첫 창립회의가 열렸고, 초대회장에 차재명 목사가 선출되었다. 본 공의회의 회원으로는 한국교회의 각 교파와 선교부, 기독교연합기관과 단체들이 참여함으로써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연합공의회 폐지약속을 지키지 않고 별도의 선교부 연합공의회를 존속시켰다. [제1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임원 명단] 회장 : 車載明(차재명) 부회장 : 金鍾宇(김종우) 서기 : 洪淳倬(홍순탁) 부서기 : 洪鍾弼(홍종필) 회계 : 金聖鐸(김성탁) 통계서기 : 吳華英(오화영)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계승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재정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인수인계 되었었으며(【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 회의록, 67-73쪽】),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제4회 총회 회의록부터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뒤를 잇는다고 밝혔다. “연혁 : 본회의 전신인 장감연합협의회는 1918년 3월 26일에 경성[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내에서 제1회로 개회하여 1922년 10월 26일에 신문내예배당[새문안교회]에서 제6회까지 모였었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협회를 예수교연합공의회로 변경조직하게 되었는데 협의회 회장과 서기의 성명은 왼쪽과 같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43쪽
2026-06-27 13:45:04
백년의 발자취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다
# 창립회의록의 부재, 공의회 규칙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창립회록은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합공의회 창립 초기에 확정된 규칙은 1924년 당시 연합공의회 설립을 보도한 「기독신보」의 1923년 10월 10일자 기사와 1979년 전택부가 편집한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의 부록에 소개된 1924년 공의회 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출범 이전에 창립 교단인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23년 제12회 총회를 통해서 보고한 규칙의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 회의록, 67-73쪽】 #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목적으로 함 위를 통해 확인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규칙에서는 공의회의 출범의 목적과 권한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뎨일쟝 뎨이됴, 본회의 목뎍 一. 협동ᄒᆞ야 복음을 선젼ᄒᆞᆷ. 二. 협동ᄒᆞ야 샤회도덕의 향상을 도모ᄒᆞᆷ. 三. 협동ᄒᆞ야 긔독교 문화를 보급케ᄒᆞᆷ. 뎨이쟝 뎨ᄉᆞ됴 본회의 권한은 연합 각 단톄의 뎨의(提議)를 밧어 처리ᄒᆞ며 본회에서 결의ᄒᆞᆫ 바는 연합 각 단톄에 맛겨 실ᄒᆡᆼ케 ᄒᆞᆷ.(신경과 정치와 레ᄇᆡ 모범과 규측은 간여치 못ᄒᆞᆷ) 위의 목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전의 장감연합협의회의 단순한 친목과 협력의 차원을 넘어서서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복음선전”, “사회도덕의 향상”, “기독교 문화의 보급”이다. 이는 KNCC가 그 출범과 더불어 기독교연합기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처음으로 구체화하고 명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아닐 수 없다. # 각자의 신경, 정치, 예배의식, 규칙 등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함 아울러 본 회의 권한에서 회원교파와 단체 간의 신경, 정치, 예배의식, 규칙 등에 대해서는 상호 간섭하지 못함을 명시하고 있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출범 당시 참가한 회원교파와 단체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감리회, 조선 남감리회, 장로회 네 단체(미 남북, 호주, 캐나다 선교회), 감리회 두 단체(미감리, 남감리 선교회), 영국 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등이었다. # 회의록의 유실, 1929년 ‘대회’와 제5회 총회와의 관계 당시의 회의록에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932년부터 1937년까지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고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 명칭의 변경이며 조직 변경 같은 변화는 없었다. 현재 조선예수교(기독교)연합공의회 회의록 중에서 제1회(1924년), 제3회(1926년), 제5회(1928년) 총회 회의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29년 총회 직전에 존 모트 방문으로 ‘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가 제5회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5쪽
2026-06-27 13:45:04
백년의 발자취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여성의 참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여성의 참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5년 제2회 총회 때 감리교 선교부의 로라 에드워즈(Laura Emma Edwards, 애도시), 감리교 선교부의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아편설라, ‘미스 아편셜나’)와 앨시어 월터(Althea J. Walter, 우왈태, 진아주머니, ‘미스 월터’) 등 3명의 여성 선교사가 총대로 참여하였다. 한국 여성은 1927년 이후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제4회 총회 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대표로 유각경이 최초로 참가 1928년 제5회 총회 때에는 부서기로 활동 1929년 제6회 총회에는 김활란이 유각경의 뒤를 이어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여 서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유각경과 김활란이 교회의 대표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초교파 기독교 기관의 대표로 참가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의 여성 지도력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통해서 향상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0년 제7회 총회에서 헌법 제3장의 제7조 ‘회원’에 관한 조항에서 “단 각 연합단체에서 대표를 선정할 시에 남녀평신도 중으로도 택함을 득함”이라는 표현을 삽입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면서 여성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0, 268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0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68쪽
2026-06-27 13:45:04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1928년 예루살렘 국제대회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예루살렘 대회 참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 대회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명실공히 참가한 첫 번째 대회였다는 데 그 의미가 깊다고 본다. 원래 10명을 예상했지만 6명(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정인과, 윌리엄 노블, 사무엘 모펫)으로 장로교 2명, 감리교 4명이었다. # 농촌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표들은 예루살렘 대회를 통해서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대회 참가 이후 귀국길에 농촌선교의 모범사례 답사를 위해 농업국가로 유명한 덴마크를 방문했다. 약소국 덴마크 농촌운동의 성공 사례는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교회지도자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루살렘 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귀국한 뒤 각자가 소속한 단체와 교파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한국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 장로교회, 감리교회가 농촌운동을 시작하였고, 연합기구로서 농촌사업협동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 일제의 방해로 위축되다가 폐쇄되면서 좌절되었다.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은 식민정부의 억압,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선교를 포함한 사회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결국 용두사미격으로 끝나고 말았다.
2026-06-27 13:45:04
백년의 발자취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와 사회운동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와 사회운동
“기독교가 사회적 봉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양로원, 병원 등을 설립하기로 권면할 것이며 … 공장에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공장과 셋집을 준비하며, 기타 전도사업에 필요한 일들을 권면할 것.” 위의 글은 조선장감연합협의회가 1920년 4차 총회에서 두 교파의 공통된 사회선교의 의지를 피력한 내용 중 일부이다.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기구를 통해 교파와 교회 중심적 선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교파 간 연대와 연합운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더욱이 3ㆍ1운동 이후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유입되면서 교회 내 학생 청년들이 반기독교운동에 가담하는 과정을 겪으며, 한국기독교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에 대한 도전과 자극을 받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조직 내에 사회부를 두고 각 교파와 기독교 단체들의 사업을 지원했으며, 1932년 제9회 회의에서 「사회신조」를 발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현대어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류를 형제로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일절(一切)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강압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 전도와 교육 및 사회사업을 확장하여 그리스도 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 중에 기독교 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수탁물(受託物)로 알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공헌할 것으로 믿는 이들이다. 이상의 이상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인류의 권리와 기회평균(機會平均) 2. 인류 및 민족의 무차별 대우 3. 혼인의 신성함과 정조(貞操)에 남녀동등 책임 4. 아동의 인격존중과 소년노동의 금지 5. 여자의 교육 및 지위 개선 6. 공창 폐지 및 금주 촉진 7. 노동자 교육 및 노동시간 축소 8. 생산 및 소비에 관한 협동조합의 장려 9. 용인(傭人), 피용인(被傭人) 간에 협동조합기관의 설치 10. 소득세 및 상속세의 고율적 누진법 제정 11. 최저임금법, 소작법, 사회보험법의 제정 12. 일요일 공휴법의 제정 및 보건에 관한 입법과 시설(施設)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채택한 「사회신조」는 1928년 일본기독교연맹의 「사회신조」와 유사하지만, 당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진영의 혁명론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인간의 평등과 인권,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해법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공창폐지, 노동환경 개선, 협동조합, 세금, 임금, 소작법, 사회보험, 일요일 공휴일 보장 등의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 등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사회개혁과 변화의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하고자 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3ㆍ1운동 이후 한국사회와 교계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농촌운동, 절제운동, 기독교진흥운동, 기독교학생운동 등의 다양한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YMCA, YWCA, 감리교와 장로교의 사회운동기관들을 조율하며, 복음전도 사업 이외의 당대 사회현안에 대한 구체적 대응과 대안 모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울러 1926년 일제당국이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종교법안’을 발의했을 때에도 한국교회와 기독교단체들을 대표해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주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정체성은 일제말기 해산의 아픔을 겪고, 한동안 역사가 단절되었지만, 해방이후 새롭게 재건된 이후에도 그 정신과 목적을 계승하며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 인권과 통일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회운동을 가능케 한 역사적,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참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2019, 12-14.
2026-06-27 13:45:04
193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갈등과 분열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당연히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내적으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아빙돈 주석사건’으로 인하여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 1933년 장로교에서 공의회에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공의회의 회원을 교파 단체로만 할 것이며, 각 교파 단체의 대표를 최다 5인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서 공의회는 1933년 제10회 총회에서 논의하였는데 당시 규칙부에서는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규측부위원 보고 본부결의상항을 여좌히 보고함 一, 본부조직, 부장 강병주, 서기 라시산 二, 장로회 총회에서 제의한 본 공의회를 교파단체로 하자는 것은, 세계련합공의회규측이 비교파 단체로 가입케 한것이오며 우리 공의회도 세계련합공의회와 관계를 맷는 이상 비교파 단체를 가입한 것이 임이 잘된줄 아오며 三, 장로회 총회에서 규측 제7조를 개정하야 대표자수를 5인으로 축소하자는 것은 5인만으로는 너무나 소수인고로 장감양교파에서는 각 10인식으로 하고 각 선교회의 각 단체에서는 반수를 감하되 3인은 2인으로하고 1인은 그냥 1인 그대로 함이 가한줄 아나이다. 이상의 보고 역시 본 규칙이 통과되기까지 1년간 유안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장로회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신들의 제안이 부결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곧바로 1934년 9월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그것을 보고하였다. 공의회는 1934년 제11회 총회에서 1년간 유안되었던 규칙부 보고를 채용하고 가결하였으며, 사실상 장로교의 제안이 부결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는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평북로회장의 련합공의회 해소건은 기각하고 평서로회장의 헌의한 련합공의회 탈퇴건에 대하야는 본 총회로서는 탈퇴함이 가하오며”라고 결의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4회 회의록】 52쪽 이로써 1934년 제11회 총회에 다섯 명의 대표만 파송했던 장로교는 1935년 이후에는 대표를 아예 보내지 않았다. 김인서는 장로교회의 연합공의회 탈퇴를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유일한 연합기관의 운명이 다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연합공의회가 해소될 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예상하며 통탄했다. “직접영향은 公級會 경영중인 동경교회가 분열될 것이오 주일학교연합회도 장차 분립될지 모을것이며 장ㆍ감양파간의 파쟁은 일층노골화할 것이다. 연합파열의 책임이 장로교에 잇는가 감리교회에 잇는가 장ㆍ감양교회 속에 숨어 있는 政黨的某團某會의 ᄲᅮ리 깁흔 파쟁에서 양조(釀造)되는가 그 책임이 장로교회에 잇든지 감리교에 잇든지 某團係某會人의게 잇든지 불문하고 오십주년기념으로 장ㆍ감연합공의회를 ᄭᅢ여버린다면 조선 사람은 합할 수 없는 못된 민족이란 것을 천하 교회에 증명하고도 남음이 잇슬 것이다.” 장로교 총회의 탈퇴 결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합공의회를 교파들만의 모임으로 하기를 원했으며, 나아가 장로교총회의 규모에 비해 총대수가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급기야 연합공의회의 탈퇴라는 극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연합운동의 위기와 더불어 교파주의가 극성을 부린 것이다. 이후에 장로교에서는 1936년 제25회 장로교 총회에서 다시 공의회에 가입하자는 헌의가 있었으나 1년간 유안하였고, 1937년 제26회 장로교 총회에서 “작년에 유안하였던 연합공의회에 재가입건은 총회로써 불필요로 인정하고 탈퇴한지 불과 2년만에 다시 가입할수 없사오며(양주삼 씨의 설명을 듣고 토의한 후 가입하지 않기로 가결함)”라고 결정하면서 재가입의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6회 회의록】 61쪽 이후에도 공의회측은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장로교가 다시 공의회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일제의 압력에 저항해도 모자를 판에 서로 자신의 주장만 고수하다가 해산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2026-06-27 13:45:04
1937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해산
1936년 도쿄에서 일본 군벌이 소위 2ㆍ26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란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는 데 광분했다. 그는 우선 사이토 마고토 전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전임자 우가키 가스시게(宇垣一成) 총독의 소위 자력갱생의 경제정책을 대륙침략을 위한 식량과 군수물자 보급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드디어 1937년 7월을 기하여 일본 관동군이 만주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트집잡아 중일전쟁을 도발시켰다. 그해 10월 2일을 기하여 다시 미나미 총독은 한국민에게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발표해 가지고 모든 학교와 사회단체와 교회 집회에까지 이를 강요했다. 1938년 2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발표해서 한국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강제로 전쟁에 징발했으며, 그해 8월에는 새로운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학교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까지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1940년 2월에는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령을 내려 한국인이 모조리 일본인 성과 이름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동아일보〉ㆍ〈조선일보〉 두 신문을 폐간했으며, 러시아 공산당ㆍ이탈리아 흑의단(黑衣團)ㆍ독일 나치스당에 해당하는 ‘국민운동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1941년 3월에는 사상범 예비구금령을 공포함으로써 소위 반일 친미분자ㆍ요시찰인ㆍ선교사들을 검거했다. 그해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불시 습격하여 미일전쟁을 도발했고,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 민족에게는 실로 최악의 시기였다. 이때의 한국 교회사는 굴곡과 유린의 역사요, 순교와 배교의 사건이 엇갈린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공의회는 1936년 9월 22일 서울 예수교서회 회의실에서 제13회 총회를 소집했다. 이 총회에서 1938년 10월 중국 항저우에서 모이게 될 IMC선교대회에 한국 대표 7인을 파송할 것을 결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시국에 관하여 회장 양주삼 박사는 ‘본 회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본회의 장래] 1918년 3월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장감연합협의회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는데, 본인이 그 당시에 회원의 1인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가졋엇습니다. 그 회는 제6회로 끗맛치고 1924년에 장감 양 교파 외에 각 선교사회와 기독교사업단체들을 포함하야 기독교연합공의회를조직하엿섯는데, 금번이 제13회로 모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 회집이 연합공의회로는 최종인 것 같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모르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던지 이용하야 하나님의 뜻이 실행됨으로 인간의게 유익을 끼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간에 본 공의회에서 대회 본부에 매년 미화 25불씩 부송하는 부담금이 잇는데, 1934년도부터 미납이라함으로 금년에 1935년과 1936년도까지 전부 납부한 것은 회계가 보고하려니와 본회가 대회에 대한 의무는 그것으로써 행하였습니다. 우리 공회로부터 다년간 전력하야 동경 등지에 유하는 조선인의게 선교하는 사업과 조선 내에서 신문지와 라듸오 방송국을 통하야 전도하는 등사를 어떠케하면 계속하며, 또 어떠케 하면 우리 각 교회 단체가 계속적으로 연합할는지 금번 이 총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회원들께서 우으로 내려오는 지혜와 각자가 얻은 바 경험을 가지고 잘 처리하시와 실패 중에서 성공이 잇게 하시기를 빌고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야 기도하며 또 조선에 기독교 운동이 날노 진보되여 세상에 천국이 속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936년 9월 22일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회장 양주삼 이상 회장의 발언을 통하여 당시 상황과 교회 형편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뒤의 연합공의회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양주삼 회장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연합공의회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5월 8일 ‘조선기독교연합회’라는 새 단체가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국내의 일본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 시국을 극복하자면 내선(內鮮)교회가 일치단결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조직된 것이다.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협조하여 기독교 전도의 효과를 올려, 성실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목적 조항을 포함한 11조로 된 간단한 회칙을 통과시킨 뒤, 위원장에 일본교회의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郞), 부위원장에 아키쓰키(秋月)ㆍ정춘수(鄭春洙) 등이 당선되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법적으로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되었고, 이어 6월 7일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실행위원회는 “조선에 있는 기독교청년회는 연합단체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동맹에 가맹하는 동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종래 가맹했던 세계기독교청년회동맹과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서 탈퇴한다. 또한 이 청년회는 북미기독교청년회동맹과의 관계를 끊고, 금후 외국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일본 기독교청년회동맹에서 이를 관장한다”는 것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이는 비록 자발적인 결의인 양 형식화되었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된 것은 물론이며, 이로써 일제는 본래의 야욕을 완전히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때 한국 교회가 외부 세계와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를 들면 에든버러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는 몇 사람의 동양인을 연락위원으로 위촉한 바 있는데, 그중 한국인으로는 백낙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대회에 참석차 출국했다가 1937년 에든버러 회의와 옥스퍼드 회의에 한국 연락위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 회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회의로서 전 유럽 교회가 어떻게 하면 나치즘과 파시즘을 막아내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만약 세계 교회가 전체주의를 막아낼 만한 힘이 있었다면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백낙준 박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해산되기 직전인 1937년까지 가맹된 회원 교파와 단체들은 조선야소교장로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북장로선교사회, 북감리선교사회, 남감리선교사회, 캐나다연합선교사회, 호장로선교사회, 재일본캐나다장로교선교사회, 영국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선예수교서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이었다. [『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第十四回會錄』, 1937.8-10. ;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251-252에서 재인용.] 【참고】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홍성사, 2017, 154-158쪽
2026-06-27 13:45:04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재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교회는 무너진 교회 조직의 재건, 훼손된 신앙의 회복, 교회 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씨름해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교회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설립에 참여했던 교계지도자들은 해방 직후 남부대회를 개최(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하고 이 조직을 그대로 살려나가고자 했다. 이들은 첫째,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왕에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단이 이루어진 만큼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해방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독교의 통합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국, 1956, 50-51.】 그러나 이 대회에 참가한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표자들뿐이었다. 이뿐 아니라 이 모임은 개회 벽두부터 수십 명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회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45년 11월 27-30일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것이 실질적인 제1차 남부대회였다. 이 대회는 회장 김관식, 부회장 김영섭 등 임원진을 선출한 후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가졌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여기서 결의된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신문 「기독교공보」의 발행이었다. 이 신문은 1946년 1월 김춘배를 발행인 겸 편집부장으로 하여 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남부대회는 안팎으로 도전과 난관에 직면했다. 1945년 9월 대회에서 퇴장했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 재건 선언을 하였고, 장로교에서도 기존의 장로교 체제로 환원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여망 때문에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들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의 모임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1946년 4월 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차 남부대회에서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서정민, “일제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6호, 2002년 2월, 94-98 ;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 『한국기독교사연구』 30호, 1990. 25.】 기독교조선남부대회는 해체되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이들은 1937년에 해산되었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재건에 참여해 1946년 10월 9일 서울YMCA회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에 참여하여 연합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기독교연합회 발족” 「大韓獨立新聞」, 1946년 10월 17일자 2면 ; “기독교 신교 각파 연합회의를 조직”, 「자유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2면.】 조선기독교연합회에는 장로교ㆍ감리교ㆍ성결교ㆍ구세군ㆍ재입국한 각국 선교부, 대한성서공회, YMCA, YWCA를 비롯한 기독교 기관 등 당시 남한 기독교를 대표하던 거의 대부분의 단체들이 참여했다. 이 연합회의 초대 회장에 김관식, 총무 임영빈, 간사 엄요섭이 선출되었으며, 1937년 해산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헌장을 그대로 채용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6-18.】 【참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2019, 16-17.
2026-06-27 13:45:04
1950년대, ‘반공과 용공 사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공간 좌우분열기에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을 취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의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si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Statement on the Korean Situation and World Order)을 발표할 수 있었다. 6ㆍ25전쟁 막바지엔 북진통일 기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총무 유호준) 주최로 인천과 청주, 광주 등지에서 열린 이 집회에서는 교회의 휴전반대 입장을 세계교회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6ㆍ25전쟁 이후 문선명, 박태선, 나운몽 등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통일과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 직후 새로운 신앙운동의 영향을 염려해 성명서를 낸 것은 연합회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교회와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이승만 정부와 긴밀한 밀착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1952년 실시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권연호, 김종대, 안창기 등 각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들을 선임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전국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 선거 운동을 지원키로 한 후 “기독교인의 대통령” 이승만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초기에 전국 각급 학교에서 태극기배례를 시행하였는데, 다수 초등학생의 국기배례거부운동이 일어나 집단 퇴학과 고초를 겪는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적극적으로 대응, ‘국기배례거부운동’을 전개했으며, 마침내 국기배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변경하는 성과를 내며 한국교회의 신앙적 입장을 신생 정부에 개진하고 대변하여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가 여부를 놓고 커다란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 창립총회(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관식 목사가 한국장로교의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제안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이 ‘교리의 위반’과 ‘용공’을 문제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갈등과 논쟁은 1954년 제2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미국 에반스톤) 이후 격화되었고, 장로교 에큐메니칼 진영(연동측)과 복음주의협의회 진영(승동측)이 나뉘어져, 마침내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커다란 분열을 겪게 되었다. 당시 미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있던 선교부들은 ‘통합’ 측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교회 내 견해 차이는 이후 성결교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복음주의협의회라는 두 연합기관의 탈퇴문제가 성결교 분열의 쟁점이 되었다.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분열과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통해 내재화된 공포와 증오(트라우마)는 한국교회를 신앙적으로 보다 보수화하고, 이념적으로 반공에 함몰되게 했다. 이로인해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운동도 신학적, 이념적 의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교회분열의 아픔까지 이어졌다. 1950년대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직후 친일청산의 기회를 상실한 채 친기독교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교회와 국가’의 밀월 관계를 형성하며 반공적, 보수적 기독교연합기구의 정체성을 수립해 나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6ㆍ25전쟁의 참상을 거치며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은 그 신학적 개방성에 대한 경계와 용공 시비에 휘말리며 한국교회 내에서 진보적 운동으로 인식되는 이중 구조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3권, 17-18쪽
2026-06-27 13:45:04
19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전향적 진로
“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교직자는 민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으로 일어나는 비열한 교권싸움, 타락한 성직자의 부정부패정권 참여, 자숙을 모르는 친일파와 모리배의 교권 장악 등등” 【“사설”, 「크리스챤」, 1961년 6월 19일자】 1961년 4ㆍ19 민주항쟁 직후, 한 교계언론의 한국교회 진단의 글이다. 4ㆍ19의 경험은 지난 이승만 정권 기간 권력과 물질에 현혹, 중독되어 있던 한국교회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적인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1960년 3월 15일 정ㆍ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여실히 드러내며 마침내 4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몇몇 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교회 정화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이러한 전환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민주국가 건설과 사회정의 수립에 역행했던 여러 사실과 부정선거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이 박탈당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었으며, 또 “3ㆍ15 부정선거는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처사”이고, “자연발생적인 마산의 시위를 유혈사태로 이끈 정부의 시책”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3일 민족에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전국을 휩쓴 청소년 학도들의 평화적 시위는 3ㆍ1운동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교육의 정신에 입각하여 앞으로 더욱더 학행일치의 진정한 교육을 실시할 것”이며,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고, 3ㆍ15 부정선거는 공정한 재선거로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반성은 철저하지 못했고, 이러한 각성의 분위기는 교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이를 ‘군사혁명’이라 명명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반공과 친미를 앞세운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한경직, 김활란 등 교회 지도자들은 쿠데타 직후인 6월 하순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해 미주지역을 방문했다. 쿠데타 직후 한국교회의 지지 속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내 한국교회와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 타결하고자 했다. 1965년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한일협정에 조인했다. 강신명, 강원용,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 교회 지도자들은 7월 영락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고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반대운동 자체는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국교회가 국가권력을 상대로 교파를 초월한 연대를 통해 비판적 사회참여를 시도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69년 2월 28일 경동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변경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삼선개헌 반대 입장 성명을 9월에 발표했다.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김재준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반해 김준권, 김윤찬, 김장환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등에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시도를 지지했다(「교회연합신보」, 1969년 9월 14일자). 1969년 삼선개헌에 대한 기독교계의 찬반논쟁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보수진영과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진영이 선명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 기독교계에 생긴 큰 변화로써 1970년대 이후 교회의 양극화를 예고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헌장 개정에 들어갔다. 1924년 한국NCC가 조직된 이래 1969년까지의 헌장정신과 기구조직은 IMC의 영향과 그 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었다. 가령 회원단체는 국내의 각 교파만 아니라 국내의 각 선교부 및 기독교단체로 규정된 것을 비롯해 그 기능도 ‘선교’에 역점을 두었지, 에큐메니칼 운동은 차순위였다. 그러나 1948년 창설된 WCC의 회원구성 원칙을 참고함으로써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양 측면을 균형있게 강조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명칭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바꾸었다. 이는 1948년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여향이었다. 둘째 제1장 총칙 제1조를 WCC의 정신을 그대로 채용했다. 즉 “본회는 성서에서 가르친 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려고 하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친교와 연구, 협의를 나누는 단체이다”라고 명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셋째 회원구성을 국내의 각 교파에 국한 시켰다. 이것도 WCC의 회원 구성을 참고한 것이다. 물론 NCC는 WCC의 산하단체나 예속기구가 아니었고, WCC의 구성 유형에 구애받지 않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원구성의 변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기존 회원단체였던 각 교파 선교부나 기독교단체들, 평신도 단체들은 제외되고, 국내의 교파들만 남게 되었다. 1970년도 헌장 세칙에 기재된 가입교파의 회원은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였다. 넷째, 조직의 목적과 기능의 내용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국내 및 국제교회 간에 친교와 연합운동을 전개한다. ② 교회간의 연합정신을 발휘해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모한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및 국제적으로 봉사한다. ④ 본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그러나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내용을 열거하기 전에 “본회는 아래와 같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기존의‘선교’ 중심이 아닌 ‘에큐메니칼 운동’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6권」, 기독교문사, 1985, 1097.】 이렇게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박정희의 5ㆍ16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직후에는 박정희 ‘삼선개헌’을 반대했다. 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선교중심, 호교적 태도를 초월해 민족적, 사회적, 공동체적인 고민과 결단을 전향적으로 모색하게 된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진로는 비록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이었지만,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여준 전환적 시대의 개막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19-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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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의 전환과 기독교회관의 건립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KNCC) 총회에서 결의한 바대로 1970년 총회에서부터 공식적으로 기구의 명칭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변화의 결과 기구의 회원은 국내 교파 교회만으로 한정되었지만 기구의 목적은 기존의 기독교 선교에 역점을 두었던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면서 오히려 확장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헌장 [제1조] 본회는 성서에서 가르친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려고 하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친교와 연구, 협의를 하는 단체이다. … [제4조] 본회는 아래와 같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국내 및 국제교회간에 친교와 연합운동을 한다. 2. 교회간에 연합정신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모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및 국제적으로 봉사 사업을 한다. 4. 본회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모든 사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시절부터 한국NCC에 미치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의 정신적 영향력이 축소되고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1968년 WCC 제4차 웁살라 총회에서 정점을 이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한국에 깊이 수용되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1969년 12월 17일, 한국기독교회관이 완공되었다. 한국기독교회관의 건축은 다양한 기독교 기관들이 모여 있을 번듯한 공간의 필요성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결과였다. 미연합장로회가 소유하고 있던 500여 평의 대지에 지하 1층을 포함한 11층의 건물로 건축된 한국기독교회관은 당시 삼일빌딩, 조흥은행 본점과 함께 서울의 3대 고층 빌딩이었다. 건축 당시 교계 언론의 반응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건물이라는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며 한국기독교회관은 한국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야의 메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으며 한국기독교회관이 위치한 종로 “5가”는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세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난 70년대를 거치며 기독교회관은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의 상징 혹은 메카로서의 이미지를 굳혀갔다. … 그래서 언제부턴가 기독교회관은 그 정식 명칭보다는 「종로5가」 혹은 그냥 「5가」라는 별칭으로 더 잘 통하고 있다.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이제 운동권내에서 뚜렷하게 솟아오른 하나의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별 저항감 없이 통용되는 「5가권」이란 말은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신교의 사회참여 세력을 가리키고 있다.” 【“재야의 메카, 기독교회관”, 『월간조선』 7권 6호, 1986.6., 335.】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것은 한국기독교회관에는 NCCK, 기독교방송,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한국교회엿어연합회 등의 연합기관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의 교단이 입주해 있었으며 이 기관들이 한국의 민주화ㆍ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 또한 2층의 강당에서 주로 개최되었던 종교 예식 형태의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목요기도회”는 군사독재기 내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국집회였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한국기독교회관은 한국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69년 KNCC가 NCCK로의 전환이 결정되고 동시에 한국기독교회관이 완공된 것은 1970년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새로운 전기와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1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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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격 변화
이미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후반 새로운 선교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사회참여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였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1968년 산업전도가 산업선교로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고,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내에 도시선교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도시빈민선교가 시작되었다. 1969년 출범한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은 ‘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기독청년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학생사회개발단의 기본정신은 다음과 같았다. “기독학생으로서 ‘예수의 생애’에 동참하는 자라면 우리는 오늘날 희생적인 사랑과 행동의 결단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결단이며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값비싼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주년 기념사업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다락원, 1998, 245.】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그리고 변화된 기독청년운동은 흐름은 정부 당국과 갈등을 빚었다. 주민조직이론에 기반을 둔 도시선교위원회의 제1차 실무자 훈련프로그램은 훈련생들이 연행되고 훈련지역의 판자촌이 강제 철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이런 갈등은 유신체제 성립 이후로 더욱 첨예해져갔다.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도시빈민선교기관인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주요인물들이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KSCF는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지향을 민주화 인권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NCCK는 1973년 4월 ‘오늘의 구원’ 협의회를 개최하고 한국에서의 사회적 구원을 “1) 모든 사람이 각종의 불의의 세력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 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과 자아를 회복하는 것, 3)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실제적인 문제 중 하나를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형성”을 꼽았다. 이어 1973년 11월 인권문제협의회를 개최하고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한편 인권신장을 위한 상설기구를 둘 것을 NCCK 실행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74년 5월 4일, NCCK 인권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인권위원회 창설 이후 NCCK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와사회위원회, 선교위원회, 선교자유수호위원회 등이 한국의 재야와 학생 민주화운동가들을 정부의 탄압에서 보호하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여론의 악화를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NCCK의 인권의제는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불편부당한 재판, 언론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재소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노동권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갔다. 각종 자유권의 유보를 당연시하며 돌진적 산업화를 추구하던 유신정부와의 정면 대결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권을 신장하고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향상하며 사회정의를 수립하고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의 정치적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고 신앙적 양심의 호소를 외면할 때 우리의 협력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정권에 대항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절감한다.” 【“성명서 – 최근 정부 요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발언에 관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4년 11월 16일 발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27차 총회 부록』, 7.】 NCCK 관계자들은 1970년대 내내 상시적인 미행, 연금, 강제 연행과 강제 여행, 또는 과도한 세금 물리기(정부는 1978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의 700만원짜리 아파트에 1,600만원이 세금을 부과했다) 등의 형식으로 고초를 겪었다. 또한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은 당시로서는 사회적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빨갱이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1976년부터 빈민선교와 산업선교에 대한 용공시비가 보수적 교계를 넘어 정부와 여당의 주도 아래 확산되었다. 정보기관은 빈민선교를 이끌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빨갱이 만들기’를 집요하게 시도하였고,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용공시비는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과 맞물려 정부의 공식적인 특별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정부 특별조사반은 일부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들이 불법적인 투쟁방법을 쓰도록 교사 선동하였고 의식화를 통해 유신체제를 부인하고 있으며 인권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불법행위의 실체를 은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단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며 용공단체는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I』, 1610.】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에 대한 용공시비의 대응 논리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반공”이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에게도 반공은 강고한 한계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공주의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NCCK 역시 민주화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에 대한 보호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17-19쪽
2026-06-27 13:45:04
1970년대의 인권운동
1970년대는 한국의 인권운동이 출발한 시기로 한국의 인권운동은 종교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독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한국 인권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NCCK 인권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창립이었다.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는 1974년 4월 11일 창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라 할 수 있다. … 유신체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인권운동은 비록 정치적 자유나 자유권과 같은 기본적 수준의 인권담론을 내세우며 활동했지만 당시 이런 기초적 인권조차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상황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권운동은 또한 당시 민주화운동의 활로이기도 하였다.” 【정정훈, 『인권과 인권들』, 그린비, 2014, 47-48.】 해방 이후 미군정이 한국을 점령한 이유를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1945년 9월 7일 발표]이라고 밝힌 이후, 인권은 한국 정치세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권을 이용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인권은 곧 반공을 의미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매년 12월 유엔인권선언일을 기념하는 인권주간 행사를 진행한 이승만정권은 유엔인권선언의 기본정신을 살리는 길은 “오직 자유의 적을 발본색원하는데 일로매진”하는 것이라 주장[“10일은 인권공동선언일”, 「조선일보」 1953년 12월 10일자]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정권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내세우면서 반쿠데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인권을 경제성장, 조국근대화, 반공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면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자유권적 인권에서 생존권적 인권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역시 생존권적 인권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이정은, 「해방 후 인권담론의 형성과 제도화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48-152.】 특히 박정희 정권은 통치권자가 베풀어주는 일종의 자비로 한국의 고유한 인권적 법질서를 주장[「인권연보」 1963, 16-18.]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는 인권사상의 기본 이해가 부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를 의미했던 유신헌법 제정 역시 “진정한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의 토대 위에서 온 민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닌 바 인간으로서의 존귀한 권리를 마음껏 누려가면서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점이 바로 세계인권선언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알맞게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선전될 지경이었다. 【“인권주간을 맞는 소회”, 「경향신문」 1972년 12월 9일자.】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국가권력이 인권담론을 독점했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가치가 지닌 저항성이 전혀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민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저항적 정신의 근거를 ‘민권’으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민권 개념은 구한말 국가의 위기 속에서 보급되었다. 당시 개화지식인들은 민권을 강조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고, 민권을 ‘개인적 권리가 아닌 애국적 의무’와 연계시켰다. 이들에게 개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인권은 오히려 국가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었다. 【전상숙, “한말 ‘민권’ 인식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개인’과 ‘사회’ 인식에 대한 원형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2), 2012.2, 5-33 참조.】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로도 「사상계」 계열의 지식인들에게 이어졌다. 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의 실체인 민중을 권리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문지영은 장준하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무의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장준하는 일관되게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세력의 실체인 민중을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 보고 있었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된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문지영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장준하가 인권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민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이유를 “제3세계인 한국의 자유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에 비해 갖는 특성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규정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지영,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 정부수립 후 1970년대까지 그 양면적 전개와 성격에 관한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29-140.】 1970년대 중반 한국의 인권운동이 기독교계 종교기관들에 의해 출발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헌법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완전히 파괴한 유신헌법의 출현 이후,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민간의 지식인들과 동일한 지향을 가지면서도 천부인권설에 기반한 권리와 신학을 공유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가 인권을 저항의 이념으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NCCK의 모습은 한국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민주화ㆍ인권운동의 주요 자료일 뿐 아니라 파괴된 민주주의의 폐허 위에서 인권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으로 되살아났는지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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