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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인권운동

입력 : 2026-06-27 13:45:04 수정 : 2026-06-28 11: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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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한국의 인권운동이 출발한 시기로 한국의 인권운동은 종교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독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한국 인권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NCCK 인권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창립이었다.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는 1974년 4월 11일 창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라 할 수 있다. … 유신체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인권운동은 비록 정치적 자유나 자유권과 같은 기본적 수준의 인권담론을 내세우며 활동했지만 당시 이런 기초적 인권조차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상황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권운동은 또한 당시 민주화운동의 활로이기도 하였다.” 【정정훈, 『인권과 인권들』, 그린비, 2014, 47-48.】

 

해방 이후 미군정이 한국을 점령한 이유를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1945년 9월 7일 발표]이라고 밝힌 이후, 인권은 한국 정치세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권을 이용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인권은 곧 반공을 의미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매년 12월 유엔인권선언일을 기념하는 인권주간 행사를 진행한 이승만정권은 유엔인권선언의 기본정신을 살리는 길은 “오직 자유의 적을 발본색원하는데 일로매진”하는 것이라 주장[“10일은 인권공동선언일”, 「조선일보」 1953년 12월 10일자]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정권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내세우면서 반쿠데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인권을 경제성장, 조국근대화, 반공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면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자유권적 인권에서 생존권적 인권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역시 생존권적 인권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이정은, 「해방 후 인권담론의 형성과 제도화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48-152.】

 

특히 박정희 정권은 통치권자가 베풀어주는 일종의 자비로 한국의 고유한 인권적 법질서를 주장[「인권연보」 1963, 16-18.]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는 인권사상의 기본 이해가 부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를 의미했던 유신헌법 제정 역시 “진정한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의 토대 위에서 온 민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닌 바 인간으로서의 존귀한 권리를 마음껏 누려가면서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점이 바로 세계인권선언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알맞게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선전될 지경이었다. 【“인권주간을 맞는 소회”, 「경향신문」 1972년 12월 9일자.】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국가권력이 인권담론을 독점했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가치가 지닌 저항성이 전혀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민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저항적 정신의 근거를 ‘민권’으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민권 개념은 구한말 국가의 위기 속에서 보급되었다. 당시 개화지식인들은 민권을 강조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고, 민권을 ‘개인적 권리가 아닌 애국적 의무’와 연계시켰다. 이들에게 개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인권은 오히려 국가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었다. 【전상숙, “한말 ‘민권’ 인식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개인’과 ‘사회’ 인식에 대한 원형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2), 2012.2, 5-33 참조.】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로도 「사상계」 계열의 지식인들에게 이어졌다. 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의 실체인 민중을 권리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문지영은 장준하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무의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장준하는 일관되게 개인이 아닌 민족, 그리고 민족세력의 실체인 민중을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 보고 있었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된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문지영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장준하가 인권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민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이유를 “제3세계인 한국의 자유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에 비해 갖는 특성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규정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지영,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 정부수립 후 1970년대까지 그 양면적 전개와 성격에 관한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29-140.】

 

1970년대 중반 한국의 인권운동이 기독교계 종교기관들에 의해 출발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헌법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완전히 파괴한 유신헌법의 출현 이후,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민간의 지식인들과 동일한 지향을 가지면서도 천부인권설에 기반한 권리와 신학을 공유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가 인권을 저항의 이념으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NCCK의 모습은 한국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민주화ㆍ인권운동의 주요 자료일 뿐 아니라 파괴된 민주주의의 폐허 위에서 인권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으로 되살아났는지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20-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