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리온 회의 40주년 기념 평화신학포럼」 후기
- 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회(위원장 오세조 목사)-화해와통일위원회(위원장 김현호 사제)는 지난 6월 30일(화), 글리온회의 40주년을 맞아 평화신학포럼을 개최하였습니다. 1986년 글리온 회의가 남긴 에큐메니칼 평화의 정신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전쟁과 군사화, 핵위협과 기
-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하다.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 창립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창설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독자적인 연합기구인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병존했다. 장감연합협의회에서는 1922년 10월 26일 제6회 회의에서 두 연합기구의 통합 건에 대해 의논했으며, 이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1928년 예루살렘 국제대회
-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예루살렘 대회 참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 대회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명실공히 참가한 첫 번째 대회였다는 데 그 의미가 깊다고 본다. 원래 10명을 예상했지만 6명(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 193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갈등과 분열
-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당연히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내적으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아빙돈 주석사건&
- 1937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해산
- 1936년 도쿄에서 일본 군벌이 소위 2ㆍ26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란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는 데 광분했다. 그는 우선 사이토 마고토 전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재건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교회는 무너진 교회 조직의 재건, 훼손된 신앙의 회복, 교회 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씨름해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교회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 1950년대, ‘반공과 용공 사이’
-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공간 좌우분열기에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을 취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의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si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
- 19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전향적 진로
- “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교직자는 민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