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하다.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 창립하다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의 창설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독자적인 연합기구인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병존했다. 장감연합협의회에서는 1922년 10월 26일 제6회 회의에서 두 연합기구의 통합 건에 대해 의논했으며, 이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1928년 예루살렘 국제대회
-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예루살렘 대회 참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 대회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명실공히 참가한 첫 번째 대회였다는 데 그 의미가 깊다고 본다. 원래 10명을 예상했지만 6명(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 193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갈등과 분열
-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당연히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내적으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아빙돈 주석사건&
- 1937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해산
- 1936년 도쿄에서 일본 군벌이 소위 2ㆍ26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란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는 데 광분했다. 그는 우선 사이토 마고토 전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재건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교회는 무너진 교회 조직의 재건, 훼손된 신앙의 회복, 교회 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씨름해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교회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 1950년대, ‘반공과 용공 사이’
-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공간 좌우분열기에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을 취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의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si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
- 19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전향적 진로
- “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교직자는 민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
- 197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의 전환과 기독교회관의 건립
-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KNCC) 총회에서 결의한 바대로 1970년 총회에서부터 공식적으로 기구의 명칭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변화의 결과 기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