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공간 좌우분열기에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을 취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뉴욕의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si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Statement on the Korean Situation and World Order)을 발표할 수 있었다.
6ㆍ25전쟁 막바지엔 북진통일 기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총무 유호준) 주최로 인천과 청주, 광주 등지에서 열린 이 집회에서는 교회의 휴전반대 입장을 세계교회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6ㆍ25전쟁 이후 문선명, 박태선, 나운몽 등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통일과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 직후 새로운 신앙운동의 영향을 염려해 성명서를 낸 것은 연합회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교회와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이승만 정부와 긴밀한 밀착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1952년 실시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권연호, 김종대, 안창기 등 각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들을 선임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전국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 선거 운동을 지원키로 한 후 “기독교인의 대통령” 이승만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초기에 전국 각급 학교에서 태극기배례를 시행하였는데, 다수 초등학생의 국기배례거부운동이 일어나 집단 퇴학과 고초를 겪는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적극적으로 대응, ‘국기배례거부운동’을 전개했으며, 마침내 국기배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변경하는 성과를 내며 한국교회의 신앙적 입장을 신생 정부에 개진하고 대변하여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가 여부를 놓고 커다란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 창립총회(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관식 목사가 한국장로교의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제안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이 ‘교리의 위반’과 ‘용공’을 문제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갈등과 논쟁은 1954년 제2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미국 에반스톤) 이후 격화되었고, 장로교 에큐메니칼 진영(연동측)과 복음주의협의회 진영(승동측)이 나뉘어져, 마침내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커다란 분열을 겪게 되었다. 당시 미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있던 선교부들은 ‘통합’ 측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교회 내 견해 차이는 이후 성결교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복음주의협의회라는 두 연합기관의 탈퇴문제가 성결교 분열의 쟁점이 되었다.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분열과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통해 내재화된 공포와 증오(트라우마)는 한국교회를 신앙적으로 보다 보수화하고, 이념적으로 반공에 함몰되게 했다. 이로인해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칼운동도 신학적, 이념적 의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교회분열의 아픔까지 이어졌다.
1950년대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해방직후 친일청산의 기회를 상실한 채 친기독교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교회와 국가’의 밀월 관계를 형성하며 반공적, 보수적 기독교연합기구의 정체성을 수립해 나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6ㆍ25전쟁의 참상을 거치며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은 그 신학적 개방성에 대한 경계와 용공 시비에 휘말리며 한국교회 내에서 진보적 운동으로 인식되는 이중 구조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3권, 17-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