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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전향적 진로

입력 : 2026-06-27 13:45:04 수정 : 2026-06-28 11: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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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교직자는 민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민중의 적으로 지탄받아 왔다. … 교단의 사분오열로 일어난 피투성이의 강단싸움, 법정소송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제보따리를 둘러싼 추문, 딸라의 농락과 굴종으로 일어나는 비열한 교권싸움, 타락한 성직자의 부정부패정권 참여, 자숙을 모르는 친일파와 모리배의 교권 장악 등등” 【“사설”, 「크리스챤」, 1961년 6월 19일자】

 

1961년 4ㆍ19 민주항쟁 직후, 한 교계언론의 한국교회 진단의 글이다. 4ㆍ19의 경험은 지난 이승만 정권 기간 권력과 물질에 현혹, 중독되어 있던 한국교회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적인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1960년 3월 15일 정ㆍ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여실히 드러내며 마침내 4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몇몇 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교회 정화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이러한 전환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민주국가 건설과 사회정의 수립에 역행했던 여러 사실과 부정선거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이 박탈당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었으며, 또 “3ㆍ15 부정선거는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처사”이고, “자연발생적인 마산의 시위를 유혈사태로 이끈 정부의 시책”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월 23일 민족에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전국을 휩쓴 청소년 학도들의 평화적 시위는 3ㆍ1운동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교육의 정신에 입각하여 앞으로 더욱더 학행일치의 진정한 교육을 실시할 것”이며,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고, 3ㆍ15 부정선거는 공정한 재선거로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반성은 철저하지 못했고, 이러한 각성의 분위기는 교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이를 ‘군사혁명’이라 명명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반공과 친미를 앞세운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한경직, 김활란 등 교회 지도자들은 쿠데타 직후인 6월 하순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해 미주지역을 방문했다.

 

쿠데타 직후 한국교회의 지지 속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내 한국교회와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 타결하고자 했다. 1965년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한일협정에 조인했다. 강신명, 강원용,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 교회 지도자들은 7월 영락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고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반대운동 자체는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국교회가 국가권력을 상대로 교파를 초월한 연대를 통해 비판적 사회참여를 시도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69년 2월 28일 경동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변경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삼선개헌 반대 입장 성명을 9월에 발표했다.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김재준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반해 김준권, 김윤찬, 김장환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등에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시도를 지지했다(「교회연합신보」, 1969년 9월 14일자).

 

1969년 삼선개헌에 대한 기독교계의 찬반논쟁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보수진영과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진영이 선명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 기독교계에 생긴 큰 변화로써 1970년대 이후 교회의 양극화를 예고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9년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헌장 개정에 들어갔다. 1924년 한국NCC가 조직된 이래 1969년까지의 헌장정신과 기구조직은 IMC의 영향과 그 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었다. 가령 회원단체는 국내의 각 교파만 아니라 국내의 각 선교부 및 기독교단체로 규정된 것을 비롯해 그 기능도 ‘선교’에 역점을 두었지, 에큐메니칼 운동은 차순위였다. 그러나 1948년 창설된 WCC의 회원구성 원칙을 참고함으로써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양 측면을 균형있게 강조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명칭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바꾸었다. 이는 1948년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여향이었다. 둘째 제1장 총칙 제1조를 WCC의 정신을 그대로 채용했다. 즉 “본회는 성서에서 가르친 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려고 하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친교와 연구, 협의를 나누는 단체이다”라고 명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셋째 회원구성을 국내의 각 교파에 국한 시켰다. 이것도 WCC의 회원 구성을 참고한 것이다. 물론 NCC는 WCC의 산하단체나 예속기구가 아니었고, WCC의 구성 유형에 구애받지 않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원구성의 변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기존 회원단체였던 각 교파 선교부나 기독교단체들, 평신도 단체들은 제외되고, 국내의 교파들만 남게 되었다. 1970년도 헌장 세칙에 기재된 가입교파의 회원은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였다. 넷째, 조직의 목적과 기능의 내용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국내 및 국제교회 간에 친교와 연합운동을 전개한다. ② 교회간의 연합정신을 발휘해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도모한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및 국제적으로 봉사한다. ④ 본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그러나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내용을 열거하기 전에 “본회는 아래와 같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기존의‘선교’ 중심이 아닌 ‘에큐메니칼 운동’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6권」, 기독교문사, 1985, 1097.】

 

이렇게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박정희의 5ㆍ16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직후에는 박정희 ‘삼선개헌’을 반대했다. 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선교중심, 호교적 태도를 초월해 민족적, 사회적, 공동체적인 고민과 결단을 전향적으로 모색하게 된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진로는 비록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이었지만,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여준 전환적 시대의 개막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19-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