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도쿄에서 일본 군벌이 소위 2ㆍ26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란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는 데 광분했다. 그는 우선 사이토 마고토 전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전임자 우가키 가스시게(宇垣一成) 총독의 소위 자력갱생의 경제정책을 대륙침략을 위한 식량과 군수물자 보급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드디어 1937년 7월을 기하여 일본 관동군이 만주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트집잡아 중일전쟁을 도발시켰다. 그해 10월 2일을 기하여 다시 미나미 총독은 한국민에게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발표해 가지고 모든 학교와 사회단체와 교회 집회에까지 이를 강요했다. 1938년 2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발표해서 한국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강제로 전쟁에 징발했으며, 그해 8월에는 새로운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학교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까지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1940년 2월에는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령을 내려 한국인이 모조리 일본인 성과 이름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동아일보〉ㆍ〈조선일보〉 두 신문을 폐간했으며, 러시아 공산당ㆍ이탈리아 흑의단(黑衣團)ㆍ독일 나치스당에 해당하는 ‘국민운동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1941년 3월에는 사상범 예비구금령을 공포함으로써 소위 반일 친미분자ㆍ요시찰인ㆍ선교사들을 검거했다. 그해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불시 습격하여 미일전쟁을 도발했고,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 민족에게는 실로 최악의 시기였다. 이때의 한국 교회사는 굴곡과 유린의 역사요, 순교와 배교의 사건이 엇갈린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공의회는 1936년 9월 22일 서울 예수교서회 회의실에서 제13회 총회를 소집했다. 이 총회에서 1938년 10월 중국 항저우에서 모이게 될 IMC선교대회에 한국 대표 7인을 파송할 것을 결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시국에 관하여 회장 양주삼 박사는 ‘본 회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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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의 장래] 1918년 3월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장감연합협의회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는데, 본인이 그 당시에 회원의 1인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가졋엇습니다. 그 회는 제6회로 끗맛치고 1924년에 장감 양 교파 외에 각 선교사회와 기독교사업단체들을 포함하야 기독교연합공의회를조직하엿섯는데, 금번이 제13회로 모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 회집이 연합공의회로는 최종인 것 같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모르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던지 이용하야 하나님의 뜻이 실행됨으로 인간의게 유익을 끼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간에 본 공의회에서 대회 본부에 매년 미화 25불씩 부송하는 부담금이 잇는데, 1934년도부터 미납이라함으로 금년에 1935년과 1936년도까지 전부 납부한 것은 회계가 보고하려니와 본회가 대회에 대한 의무는 그것으로써 행하였습니다. 우리 공회로부터 다년간 전력하야 동경 등지에 유하는 조선인의게 선교하는 사업과 조선 내에서 신문지와 라듸오 방송국을 통하야 전도하는 등사를 어떠케하면 계속하며, 또 어떠케 하면 우리 각 교회 단체가 계속적으로 연합할는지 금번 이 총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회원들께서 우으로 내려오는 지혜와 각자가 얻은 바 경험을 가지고 잘 처리하시와 실패 중에서 성공이 잇게 하시기를 빌고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야 기도하며 또 조선에 기독교 운동이 날노 진보되여 세상에 천국이 속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936년 9월 22일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회장 양주삼 |
이상 회장의 발언을 통하여 당시 상황과 교회 형편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뒤의 연합공의회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양주삼 회장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지로 인함인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함인지” 연합공의회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5월 8일 ‘조선기독교연합회’라는 새 단체가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국내의 일본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 시국을 극복하자면 내선(內鮮)교회가 일치단결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조직된 것이다.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협조하여 기독교 전도의 효과를 올려, 성실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목적 조항을 포함한 11조로 된 간단한 회칙을 통과시킨 뒤, 위원장에 일본교회의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郞), 부위원장에 아키쓰키(秋月)ㆍ정춘수(鄭春洙) 등이 당선되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법적으로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되었고, 이어 6월 7일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실행위원회는 “조선에 있는 기독교청년회는 연합단체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동맹에 가맹하는 동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종래 가맹했던 세계기독교청년회동맹과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서 탈퇴한다. 또한 이 청년회는 북미기독교청년회동맹과의 관계를 끊고, 금후 외국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일본 기독교청년회동맹에서 이를 관장한다”는 것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이는 비록 자발적인 결의인 양 형식화되었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된 것은 물론이며, 이로써 일제는 본래의 야욕을 완전히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때 한국 교회가 외부 세계와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를 들면 에든버러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는 몇 사람의 동양인을 연락위원으로 위촉한 바 있는데, 그중 한국인으로는 백낙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대회에 참석차 출국했다가 1937년 에든버러 회의와 옥스퍼드 회의에 한국 연락위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 회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회의로서 전 유럽 교회가 어떻게 하면 나치즘과 파시즘을 막아내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만약 세계 교회가 전체주의를 막아낼 만한 힘이 있었다면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백낙준 박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해산되기 직전인 1937년까지 가맹된 회원 교파와 단체들은 조선야소교장로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북장로선교사회, 북감리선교사회, 남감리선교사회, 캐나다연합선교사회, 호장로선교사회, 재일본캐나다장로교선교사회, 영국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선예수교서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이었다. [『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第十四回會錄』, 1937.8-10. ;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251-252에서 재인용.]
【참고】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사』, 홍성사, 2017, 154-1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