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후반 새로운 선교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사회참여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였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1968년 산업전도가 산업선교로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고,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내에 도시선교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도시빈민선교가 시작되었다. 1969년 출범한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은 ‘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기독청년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학생사회개발단의 기본정신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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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학생으로서 ‘예수의 생애’에 동참하는 자라면 우리는 오늘날 희생적인 사랑과 행동의 결단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결단이며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값비싼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주년 기념사업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다락원, 1998, 245.】 |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그리고 변화된 기독청년운동은 흐름은 정부 당국과 갈등을 빚었다. 주민조직이론에 기반을 둔 도시선교위원회의 제1차 실무자 훈련프로그램은 훈련생들이 연행되고 훈련지역의 판자촌이 강제 철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이런 갈등은 유신체제 성립 이후로 더욱 첨예해져갔다.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도시빈민선교기관인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주요인물들이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KSCF는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지향을 민주화 인권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NCCK는 1973년 4월 ‘오늘의 구원’ 협의회를 개최하고 한국에서의 사회적 구원을 “1) 모든 사람이 각종의 불의의 세력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 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과 자아를 회복하는 것, 3)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실제적인 문제 중 하나를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형성”을 꼽았다.
이어 1973년 11월 인권문제협의회를 개최하고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한편 인권신장을 위한 상설기구를 둘 것을 NCCK 실행위원회에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74년 5월 4일, NCCK 인권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인권위원회 창설 이후 NCCK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와사회위원회, 선교위원회, 선교자유수호위원회 등이 한국의 재야와 학생 민주화운동가들을 정부의 탄압에서 보호하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여론의 악화를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NCCK의 인권의제는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불편부당한 재판, 언론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재소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노동권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갔다. 각종 자유권의 유보를 당연시하며 돌진적 산업화를 추구하던 유신정부와의 정면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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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권을 신장하고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향상하며 사회정의를 수립하고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의 정치적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고 신앙적 양심의 호소를 외면할 때 우리의 협력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정권에 대항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절감한다.” 【“성명서 – 최근 정부 요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발언에 관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4년 11월 16일 발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27차 총회 부록』, 7.】 |
NCCK 관계자들은 1970년대 내내 상시적인 미행, 연금, 강제 연행과 강제 여행, 또는 과도한 세금 물리기(정부는 1978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의 700만원짜리 아파트에 1,600만원이 세금을 부과했다) 등의 형식으로 고초를 겪었다. 또한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은 당시로서는 사회적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빨갱이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1976년부터 빈민선교와 산업선교에 대한 용공시비가 보수적 교계를 넘어 정부와 여당의 주도 아래 확산되었다. 정보기관은 빈민선교를 이끌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빨갱이 만들기’를 집요하게 시도하였고,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용공시비는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과 맞물려 정부의 공식적인 특별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정부 특별조사반은 일부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들이 불법적인 투쟁방법을 쓰도록 교사 선동하였고 의식화를 통해 유신체제를 부인하고 있으며 인권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불법행위의 실체를 은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단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며 용공단체는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I』, 1610.】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에 대한 용공시비의 대응 논리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반공”이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에게도 반공은 강고한 한계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공주의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NCCK 역시 민주화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에 대한 보호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6권, 17-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