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교회는 무너진 교회 조직의 재건, 훼손된 신앙의 회복, 교회 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씨름해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교회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설립에 참여했던 교계지도자들은 해방 직후 남부대회를 개최(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하고 이 조직을 그대로 살려나가고자 했다.
이들은 첫째,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왕에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단이 이루어진 만큼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해방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독교의 통합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국, 1956, 50-51.】
그러나 이 대회에 참가한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표자들뿐이었다. 이뿐 아니라 이 모임은 개회 벽두부터 수십 명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회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45년 11월 27-30일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것이 실질적인 제1차 남부대회였다. 이 대회는 회장 김관식, 부회장 김영섭 등 임원진을 선출한 후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가졌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여기서 결의된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신문 「기독교공보」의 발행이었다. 이 신문은 1946년 1월 김춘배를 발행인 겸 편집부장으로 하여 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남부대회는 안팎으로 도전과 난관에 직면했다. 1945년 9월 대회에서 퇴장했던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 재건 선언을 하였고, 장로교에서도 기존의 장로교 체제로 환원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여망 때문에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들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의 모임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1946년 4월 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차 남부대회에서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서정민, “일제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6호, 2002년 2월, 94-98 ;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 『한국기독교사연구』 30호, 1990. 25.】
기독교조선남부대회는 해체되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이들은 1937년에 해산되었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재건에 참여해 1946년 10월 9일 서울YMCA회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에 참여하여 연합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기독교연합회 발족” 「大韓獨立新聞」, 1946년 10월 17일자 2면 ; “기독교 신교 각파 연합회의를 조직”, 「자유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2면.】
조선기독교연합회에는 장로교ㆍ감리교ㆍ성결교ㆍ구세군ㆍ재입국한 각국 선교부, 대한성서공회, YMCA, YWCA를 비롯한 기독교 기관 등 당시 남한 기독교를 대표하던 거의 대부분의 단체들이 참여했다. 이 연합회의 초대 회장에 김관식, 총무 임영빈, 간사 엄요섭이 선출되었으며, 1937년 해산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헌장을 그대로 채용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6-18.】
【참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2권』 2019, 1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