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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국기독교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도전과 모색

입력 : 2026-06-27 13:45:04 수정 : 2026-06-28 11: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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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사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에 나서자 민주화를 갈망하는 운동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세력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도 사회 모든 부문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

 

NCCK는 5ㆍ18 민주항쟁 당시 군부의 탄압과 다수의 기독교계 재야인사들의 연행으로 인해 5ㆍ18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진상규명에 나서지 못한 오점을 남겼다.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에 따르면 5ㆍ18민주항쟁에 대한 NCCK 인권위원회의 초기 대응은 ‘역사의 오점’으로 표현되고 있다. 조이제,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3, 171.】

 

그러나 1984년 6월 인권문제전국협의회에서 인권위에 “광주사태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건의하면서 비로소 진상조사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3권에 이르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출간할 수 있었다.

 

또 NCCK 차원에서 5ㆍ18 진상규명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인권위원회의 전 위원장들인 박형규와 조남기를 공동의장으로 조직된 ‘전국기독자민주쟁취대회’는 1985년 4월 26일 “5월 광주민중항쟁기념위원회”를 구성해 진상규명에 노력했다. 그해 NCCK는 5ㆍ18문제에 대한 유일한 성명서인 “광주의거 5주년에 즈음한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NCCK의 5ㆍ18민주항쟁에 대한 인식이 당시 재야, 청년학생, 유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손승호, “5ㆍ18민주화운동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3호, 2020. 참조】

 

5ㆍ18 광주민주항쟁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김의기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으며, 신촌로터리에서 기독인 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또 민주화운동을 하던 감리교 임기윤 목사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계엄합동수사단에 연행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4.】

 

박정희 정권하인 1970년대부터 인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진영은 1980년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전두환 정권과 다시 충돌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엲바,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면서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된 시점은 1983년말 이후부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NCCK 인권위원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이 1970년대 이래 꾸준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운동을 벌여온 단체들을 비롯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이하 목정평), 기독교농민회, 기독노동자연맹, 기독여민회 등의 부문별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 통일운동, 민주시민운동, 대안교육운동, 청년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외연을 다양하게 넓혀갔다.

 

1981년 조직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1986년 3월 NCCK 시국대책위 산하 ‘민주헌법실현 범기독교추천위원회’의 직선제 개헌위한 서명운동에 대해 “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5월)이 발표됨으로써 그동안 침묵을 지켜온 복음주의권의 전향적인 사회참여 선언이 이루어졌다. 그 후 이들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도 단식, 기도회, 성명발표, 시위, 농성 등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1987년 6ㆍ10항쟁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입장이 더욱 선명해지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5-247.】

 

1980년대 중후반까지 신군부 정권의 공포정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반독재투쟁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1985년 2ㆍ12 총선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군부통치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를 내세운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목정평 소속 27명의 개헌서명을 시작으로 기장, 예감, 기감 3개 교단을 중심으로 한 시국성명 발표가 잇달았다. NCCK는 1985년 3월 17일 그 간의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를 수렴해 1,050명의 서명자 명단을 공개했다[2차는 4월 26일에 2,748명을 공개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개헌과 민주화운동』, 민중사, 1986, 39.】

 

이러한 개헌 열기를 타고 NCCK, EYCK, KSCF 등 기독교 연합기관들은 민주헌법쟁취운동, 개헌서명운동,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 고문반대운동 등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김주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담론 분석”, 「대학과 선교」, 제26집, 2014, 184-185.】

 

그 결과 1987년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를 성취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6ㆍ10민주항쟁을 통해 기존의 변혁운동은 시민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받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7, 254.】

 

1980년대 NCCK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바로 통일운동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이다. 1972년 남북간에 체결된 “7ㆍ4공동성명” 이후 NCCK는 통일 및 사회정의기독교협의회를 창립했다. 그러나 1970년대 기독교의 통일논의는 교회전체보다는 통일문제에 열정적인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1988년 이전까지의 개인적 방북자로는 고려연구소장 양은식 박사(1976), 미 센트럴매소디스트대학 선우학원 교수, 미연합장로회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 이승만 목사(1978), LA한인연합회 노의선 목사(1979), LA한인연합장로교회 김성락 목사(1981),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화선 목사(회장), 이영빈 목사 부부(1981),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총무 최기환(1983) 등이 있었다. 이승만 목사와 노의선 목사는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강량욱 목사와 면담하고 김성락 목사는 김일성과 오찬 및 면담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기독교사상」, 2020년 7월호, 20-26.】

 

이후 1980년대 초부터 해외동포들 중 특히 기독교인들 간의 국제적 종교교류행사와 회의를 통해 북한과의 접촉이 모색되었다. 1981년 6월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화선 목사(회장)과 이영빈 목사 부부가 평양을 방문해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11월 북한과 해외 한인 기독인들과의 첫 접촉인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교 신자간의 대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사되었다. 이 모임에는 재미 강위조 목사, 재독 이영빈 목사와 북한의 고기준 목사 및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자주통일, 평화적 통일,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단결원칙을 강조하는 선언문(일명 ‘비엔나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기독교사상」, 2020년 7월호, 24-25.】

 

이렇게 시작된 해외에서의 ‘통일대화’는 1991년까지 유럽에서만 여섯 차례 개최되었다. 1981년 평양에서의 공동선언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후부터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영빈ㆍ김순환, 『통일과 기독교』, 고난함께, 1994.】

 

이후 1982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 1) 미군철수ㆍ자주화의 실현, 2) 반독재ㆍ민주화 실현, 3) 통일 촉진 노력, 4) 전쟁반대ㆍ평화보장 등의 내용을 담은 〈헬싱키선언〉이 발표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1980-2000 한국교회평화통일운동자료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0, 28.】

 

이러한 해외동포 기독교인들과 북한 기독교 대표자들 간의 대화는 남한교회의 기독교인들과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만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교류를 촉진하는 동인이 되었다.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 북과 해외동포ㆍ기독자 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 형상사, 1994.】

 

독일의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던 같은 시기, 1981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수유리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국과 독일 교회 대표들이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 죄책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로 한ㆍ독기독교교회협의회를 개최했다. 모임에 참석한 양국 교회 지도자들은 통일운동을 위한 양국 교회가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안에 통일문제 연구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82년 9월 각 교단 대표와 통일문제 전문가들로 교회협의회 안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통일 논의 확산을 우려한 정부 당국의 방해로 충분히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NCCK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과 연락을 취하며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ㆍ북 기독자 회담을 준비해 나갔다. 【이덕주,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교회 이야기』, 신앙과지성사, 2009, 350.】

 

1984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WCC 국제위원회가 주관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명 ‘도잔소회의’)를 일본 YMCA 시설 도잔소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주대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회의는 비록 북한 기독교 대표자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한국교회와 해외교회들이 연대해 본격적으로 협의한 최초의 회의였다. 도잔소회의의 결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 협의회 보고서와 건의안”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은 화해복음의 실천 및 목표이며 한반도 평화통일은 남북교회의 공동과제이자 세계교회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28.】

 

1980년대에 이르러 반독재, 민주적 변혁이 민족통일의 과업과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운동의 주체는 민중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은 한국교회의 통일을 위한 주체적 노력에 명분과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안병무, “한국통일문제의 성서적 조명”, 「한국기독교장로회회보」, 1981년 6월, 4-9. ; 주재용, “한국교회의 통일론”, 「기독교사상」, 1981년 6월, 32.】

 

NCCK는 1985년 2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하고 “평화의 염원은 약한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곧 민중이 가장 깊이 탄식하고 갈망하는 민중의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4차 총회,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 1985년 2월 28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한 NCCK 대표 6명과 북한의 조선기독교도련맹 대표 5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49.】

 

이는 비록 해외에서의 만남이었지만 남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분단 이후 최초로 만났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이후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NCCK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같은 해 11월에는 제2차 글리온회의로 남북기독교 대표자들이 만났으며, 이들은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평화적 통일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이유나,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26.】

 

또 1989년 3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여 김일성과 남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으며, 1992년 1월에는 NCCK 권호경 총무와 남한교회 대표들이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53.】

 

이러한 1988년 이후의 활발한 남북 교회의 민간교류와 통일논의는 남북대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는 전환기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8권, 19-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