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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도 자 료 |
교회협 언론 2018 - 93호 (2018. 7. 25) 수 신: 각 언론사 발 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언론위원회 제 목: “「7월의 시선 2018」- ‘사법농단의 주역, 대법원장 양승태’ 선정” 보도 요청의 건 |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언론위원회, 7월의 ‘(주목하는) 시선 2018’로 <사법농단의 주역, 대법원장 양승태> 선정
1. 2018년 7월 NCCK 언론위원회 ‘(주목하는) 시선’은 사법농단의 주역인 괴물 대법원장 양승태를 선정했다. 2017년 3월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외압과 인사조치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에서부터 비롯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사태는 2018년 5월말 상고법원 설치 문제를 놓고 박근혜 정권과 재판거래를 했다는 문건이 공개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 아직도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진행 중이다.
2. 특별히 위원회는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하여 진보언론과 수구언론의 논조가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중 조선일보의 경우는 더욱더 특별히 주목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처음에는 상고법원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으나, 이후 2015년 2월 6일 전 변협회장 이진강의 <상고법원이 필요한 이유> 기명 칼럼이 실리는 등 상고법원 설치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3. 2017년 3월 양승태의 법관 사찰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조선일보는 사법농단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면서 소장법관들의 문제제기를 2017년 9월의 양승태 임기만료와 관련된 법원 내의 보수-혁신갈등으로 몰고 가면서 양승태를 옹호했다.
4. 반면 여타의 언론 보도들에서 아쉬운 점은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태를 다룸에 있어서 역사적 시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양승태 사법농단 사태는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KBS 최강시사나 TBS 뉴스공장 등 일부 라디오 시사프로에서는 양승태 사태의 역사적 뿌리를 캐는 프로가 나왔으나, 진보적인 신문에서는 이같은 기획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5. 1987년 6월 항쟁 이후 현행 헌법으로 개헌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통령 직선제였고, 그 다음으로 사법부의 개혁이었을 것이다. 사법부 개혁에서는 2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하나는 위헌법률심사를 전담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추된 사법부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대통령에게 쏠려 있던 권한을 분산하여 대법원장의 위상과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민주화 이후 대법원장의 권한은 유신시대나 5공시절에 비해 상당히 강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려 가며 쟁취한 민주주의의 성과물로 마련된 대법원장의 강화된 권한을 양승태 같이 독재에 부역했던 자들이 사법엘리트로 승승장구하여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점을 파고드는 보도가 눈에띄지 않는다는 사실에 보 위원회는 주목해 보았다.
6. 이러한 시각은 이번 원구성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법사위원장 자리를 여상규가 꿰차고 앉았을 때 그 의미를 어떤 언론도 지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한국언론의 건망증과 철저하고 집요하지 못한 속성과 역사적 시각의 결여를 보여주는 심각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고 판단했다.
7. 본 위원회는 감히 한국 언론에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갖춘 집요함을 요구하며 7월의 시선으로 “사법농단의 주역, 대법원장 양승태”를 선정한다. 자세한 선정취지는 아래와 같다.
8. 한편 본 위원회는 7월의 시선으로 “사법농단의 주역, 대법원장 양승태”를 선정하며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7월 25일(수) 오후 2시, 기독교회관 2층 에이레네홀에서 “사법개혁 긴급간담회 - 대한민국 사법부는 죽었다”를 개최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자료에 포함하여 드립니다. 귀 언론의 관심과 보도를 요청합니다.
9. 선정취지 :
7월의 ‘(주목하는) 시선 2018’로 <사법농단의 주역, 대법원장 양승태>
2018년 7월 NCCK 언론위원회 ‘(주목하는) 시선’은 사법농단의 주역인 괴물 대법원장 양승태를 선정했다. 2017년 3월 소장판사들은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개혁 관련 설문조사를 하려 하자 법원행정처가 행사를 축소하라는 부당한 외압을 가하고 이에 반발한 판사에게 부당한 인사조치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여기서부터 비롯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사태는 2018년 5월말 전 대법원장 양승태가 현직에 있을 당시 상고법원 설치 문제를 놓고 박근혜 정권과 재판거래를 했다는 문건이 공개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고 아직도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문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양승태의 개인 컴퓨터는 ‘디가우징’이라는 기법으로 속된 말로 완전히 갈아버렸다고 하지만, 백업해둔 자료가 있을 수 있고, 관련 대법관이나 법원행정처 간부들의 컴퓨터를 압수수색 해보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보다 앞으로 터질 일이 더 충격적일 수 있는 사건을 <시선>에서 다루는 것이 조심스럽고 부담이 되지만,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양승태는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면서 박근혜 정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근혜 정권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안에 대한 재판을 갖고 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반헌법행위자 양승태 양승태 대법원이 “약자에 가혹하고 정치ㆍ경제 권력 편들기…‘보수 폭주’”(<한겨레> 2016년 3월 11일) 라는 비판은 재판거래 의혹에 등장하는 개별 사건 하나하나가 대법원에서 처리될 때마다 제기되곤 했다. 양승태는 취임사에서는 ‘소수자와 사회자 보호’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권과 기득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는 판결을 쏟아냈고, 이런 판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할 독립적 헌법기관인 개별 법관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대한 반헌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런데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가 양승태를 반헌법행위자열전 수록 집중검토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사법농단 사태가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인 2017년 2월의 일이다. 당시 현직 대법원장이었던 양승태는 1975년 4건의 재일동포 간첩사건에서 배석판사로, 1986년 제주지법 부장판사 시절에는 2건의 조작간첩사건에서 재판장으로 모두 유죄판결을 내렸다.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는 법관들 중 열전 수록대상자를 선정할 때 긴급조치 사건을 포함할 경우 대상자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인혁당 사건 등 주요 공안사건이나 조작간첩사건의 판결만 조사대상으로 삼고 긴급조치 사건은 제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단 집중검토대상자로 선정된 사람들이 긴급조치 사건에서는 몇 건이나 판결에 참여했는지 조사하였는데, 양승태의 경우는 12건으로 단연 최고였다고 한다. 양승태가 판결한 4건의 재일동포 간첩사건은 모두 김기춘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조작한 사건이고, 양승태는 법원에서 이를 처리한 것이 된다. 40년 뒤 대법원장과 왕실장이 되어 상고법원 설치를 둘러싼 거래의 두 주역은 경남고-서울법대의 8년 선후배 간이라는 건 말고도 이런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국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지던 2016년 12월 15일,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전 세계일보 사장 조한규는 박근혜 정부가 대법원장 양승태를 불법 사찰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에 대법원은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만일 법관에 대한 사찰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이는 헌법정신과 사법부의 독립의 원칙에 위배되는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고 발끈했다. 박근혜 정권이 대법원장 박근혜를 사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반헌법행위이지만, 양승태 자신은 과거에 조작간첩사건 판결 등 중대한 반헌법행위를 자행해왔고, 또 당시에도 법관들을 사찰하는 등 반헌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양승태를 보는 조선일보의 시선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하여 진보언론과 수구언론의 논조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중 조선일보의 경우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법원행정처가 2015년 8월 20일에 작성한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 추진전략’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법무부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BH(청와대)인식을 환기시킬 수 있는 메이저 언론사”로서 조선일보가 지목되어 있다. 조선일보는 처음에는 상고법원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으나, 2015년 2월 6일 전 변협회장 이진강의 <상고법원이 필요한 이유> 기명 칼럼이 실리는 등 상고법원 설치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2017년 3월 양승태의 법관 사찰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조선일보는 사법농단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면서 소장법관들의 문제제기를 2017년 9월의 양승태 임기만료와 관련된 법원 내의 보수-혁신갈등으로 몰고 가면서 양승태를 옹호했다. 이런 류의 기사는 3월 10일 “대법 ‘판사 부당 인사 논란 진상조사’”, 3월 15일 “판사 한 명 사표 반려했는데…법원이 시끌”, 4월 4일 “양승태 대법원장 ‘사법부 흔들기 우려할 수준’”, 4월 19일 “법원에도 정치 바람 불기 시작한 건가”, 5월 18일 “양 대법원장 ‘법원행정처 사태 책임 통감’”, 6월 22일 “판사회의 최악이었다” 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6월 27일자 <만물상>은 각자 독립된 재판 주체인 판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 ‘부끄럽다’고 한 것은 정말로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모르는 보도였다. 2018년에 들어와 조선일보는 1월 9일부터 사흘간 연달아 일부 판사들이 법원 게시판에 동료 법관을 사찰한 일부 법원행정처 판사들에 대해 격한 감정을 쏟아낸 것을 “동료 판사 욕하는 판사들”이라고만 비판했다. 2018년 5월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재판거래를 둘러싼 의혹은 각계각층에서 폭발적으로 제기되었다. 조선일보는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3차 조사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양승태를 감싸는 대신 김명수 대법원장을 “대법원장이 ‘재판 거래’라는 거짓 선동에 편승하다니” (2018년 6월 1일자 사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사법농단 사태에 대해 양승태가 기자회견을 하자 “재판거래 꿈도 못 꿀 일이다”, “대법원 신뢰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등 양승태의 입장을 두 면에 걸쳐 자세히 보도했고, 이어 6월 6일에는 “대법원장이 자초한 ‘사법의 난’”이라며 다시 김명수 대법원장을 강력히 비난했다.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하여 동아일보나 중앙일보는 나름 양승태 사법부의 문제점을 지적한 반면,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는 강력하게 양승태를 옹호하고 김명수 사법부를 비난했다.
양승태 보도와 역사적 시선의 결여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태를 다룬 일련의 보도에서 아쉬운 것은 역사적 시각의 부족이다. 양승태 사법농단 사태는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KBS 최강시사나 TBS 뉴스공장 등 일부 라디오 시사프로에서는 양승태 사태의 역사적 뿌리를 캐는 프로가 나왔으나, 진보적인 신문에서는 이같은 기획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만약 역사적 시각을 갖고 양승태 사법부가 감행한 긴급조치 위헌 무효화 판결이나 조작간첩사건 등과 관련된 국가의 손해배상 판결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시효를 변경하여 무효화 한 것은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이같은 과거사 뒤집기 판결은 단순히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양승태 자신이 초임과 중견 법관 시절 독재정권에 판결로 야합한 범죄적인 행위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에서 양승태 이전에도 나쁜 대법원장은 분명히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민복기나 전두환 시대의 유태흥은 암흑기 한국 사법부의 수장으로 대법원장으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 마땅한 나쁜 대법원장이었다. 그러나 양승태의 죄질은 이들의 과오와는 차원이 다르다. 민복기나 유태흥은 독재권력의 사법권 침해를 막지 못했고, 때로는 압력에 굴해 마지못해서, 때로는 적극적으로 정치권력의 요구에 응했다. 군사독재시절 말 안 듣는 젊은 법관들에 대한 사찰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몫이었을지는 몰라도 양승태처럼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서 젊은 법관들을 사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소장판사들이 충격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태는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자초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 양승태처럼 조작간첩사건 6건에 긴급조치사건 12건이나 한 법관이라면 사법부의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감옥에 갔어야 했을 것이고, 최소한 사법부에서 퇴출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법부에서 과거청산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양승태처럼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자들은 그 대가로 승진가도를 달리거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고, 민주화가 되자 사법부의 엘리트로서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현행 헌법으로 개헌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통령 직선제였고, 그 다음으로 사법부의 개혁이었을 것이다. 사법부 개혁에서는 2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하나는 위헌법률심사를 전담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추된 사법부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대통령에게 쏠려 있던 권한을 분산하여 대법원장의 위상과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민주화 이후 대법원장의 권한은 유신시대나 5공시절에 비해 상당히 강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려 가며 쟁취한 민주주의의 성과물로 마련된 대법원장의 강화된 권한을 양승태 같이 독재에 부역했던 자들이 사법엘리트로 승승장구하여 휘두르게 된 것이다.
작은 양승태 여상규를 놓친 무딘 시선 흔히 양승태는 극단적인 사법엘리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2018년 7월 5일자 ‘논설실의 뉴스읽기’에서는 양승태의 사법농단으로 불거진 사태를 ‘양승태 엘리트 시스템과 김명수 평등주의가 충돌’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양승태가 대변하고자 했던 사법엘리트들이란 양승태의 선배나 동년배의 경우는 군사독재정권에 순종하여 긴급조치사건이나 공안사건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면서 법원행정처 등의 요직을 거치며 순탄하게 승진해 간 사람들이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외압은 상당히 완화되었지만, 사법부의 소위 엘리트들은 기득권의 수호자로서 보수적인 면을 강화해왔다. 흔히 ‘서오남’ (서울대-50대-남성)이라 불리는 이들은 민주화 이후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 요구가 본격화되면서 여성이나 지방대 출신들이 대법관에 발탁되자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박탈감을 느끼며 내부결속을 다져왔다. 양승태는 바로 이런 수많은 양승태들의 수장이며, 현재 대법관들이나 각급 법원장의 상당수는 양승태가 임명한 작은 양승태들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양승태는 사법부에만 있는게 아니다. 양승태처럼 공안사건에서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한 뒤 승승장구하다가 국회로 진출한 사람도 있다. “금배지 단 정치검사들이 정치개혁 막는다”(한겨레, 2012년 12월 7일)는 제목의 기사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김기춘, 정형근, 홍준표, 최병국, 최연희, 장윤석 등 공안검사 출신들은 국회에서 검찰개혁을 완강하게 막아왔다. 사법부 내부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개혁의 제도화는 결국 입법부에서의 법제화를 통해 이뤄지게 마련이다. 국회에서 처리되는 모든 법안은 자구와 법률체계 심사를 위해 반드시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구ㆍ체계심사에 그쳐야할 법사위원회가 법률안 통과를 좌지우지하는 상원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은 20대 국회 개원 당시에도 있었고(“상원 법사위, 20대 국회에서는 바뀔까?”, MBC 뉴스데스크, 2016년 5월 28일), 최근의 20대 국회 후반기 원구성에서도 법사위원장을 여당과 야당 어느 쪽이 가져가느냐가 최대의 쟁점이 되었다.(“법사위원장 쟁탈전…국회 원 구성 협상 불발”, 한겨레 2018년 7월 10일). 6월 13일의지방선거에서 궤멸된 자유한국당은 아직 2년이라는 시한부 생명이 남아 있는 112석의 의석을 기반으로 끝까지 버텨 법사위원장 자리를 따냈다. 자유한국당 내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법사위원장 자리에 오른 인물은 판사 출신 여상규였다. 원구성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법사위원장 자리를 여상규가 꿰차고 앉았을 때 그 의미를 어떤 언론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언론의 건망증과 철저하고 집요하지 못한 속성과 역사적 시각의 결여를 보여주는 심각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여상규는 2018년 1월 27일 <그것이 알고 싶다 – 사라진 고문 가해자들> 편에 등장한 고문을 묵인한 수많은 판사와 검사들 중 대중들의 각별한 지탄을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상규는 1982년 진도간첩단 사건의 판사였다. 그 사건의 피고의 한 사람인 석달윤은 정보과 형사를 18년이나 지낸 인물이었는데도, 안기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비운을 겪었다. 여상규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전화로 “석달윤 씨를 혹시 기억하느냐”고 묻자 “재판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매주 한 열건 정도씩 하니 1년 이상 된 거는 기억할 수 없다”고 답했다. 제작진이 다시 “1심 판결로 한 분의 삶이 망가졌다.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웃기고 앉아있네, 이 양반이 정말”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여상규의 이런 태도는 시청자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알고 싶다> 시청자 게시판 뿐 아니라 인터넷과 SNS는 달아올랐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여상규 등 과거 국가폭력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청원이 수십 건 올라왔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채 6개월도 안되어 초미의 관심사였던 법사위원장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조작간첩 사건과 관련하여 여상규를 다룬 언론은 KBS 라디오 7월 17일자 <오태훈의 시사본부> 와 7월 24일자 <최강시사> 밖에 없었다. 고문가해자 여상규의 범죄적 판결을 발굴 보도한 SBS도 탐사프로그램과 보도프로그램의 장벽 때문인지 여상규의 경력을 다루지 않았다. 후반기 원 구성 후 처음 열린 법사위 소관 부처 업무보고 자리에서 여상규는 법사위원장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판사를 해봐서 아는데 양승태 사법부에서 논란이 된 재판거래란 있을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듣다 못한 야당의원들이 편파적인 진행을 하지말라고 항의했지만, 그는 “나는 편파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전임 법사위원장 권성동은 검찰 출신으로 검찰개혁은 물론, 탄핵 이후 개협입법의 추진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강원랜드 채용비리와 관련하여 수사대상이 된 채 법사위원장 자리를 꼭 붙들고 앉아 지탄을 받았다. 여상규의 간첩 사건 판결 전력이나 그가 법사위원장 첫날 보인 태도는 양승태 사법부의 적폐청산을 새끼 양승태인 여상규가 어떻게 막으려 하는지를 잘 보여준 예고편이었다. 여상규가 판결한 조작간첩 사건은 흔히 석달윤 사건이라 알려져있다. 그것은 석달윤의 이름으로 진실화해위원회에 재심 신청이 되어 진실규명과 재심 무죄의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여상규 등에게 가장 무거운 판결을 받은 김정인은 재심 신청을 할 수 없었다.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한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이렇게 썼다.
김정인은 1964년에 갑자기 나타난 외삼촌에게 납치되다시피 북에 끌려갔다가 3일 만에 진도로 돌아온 사실이 한번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고문에 못이겨 허위로 자백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중정의 고문은 김정인의 표현을 빌자면 “죽다가 살아났”던 수준이었다. 물론 그의 고문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문의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변호사가 김정인을 처음 만나 자신의 역할을 자세하게 설명했음에도 변호사를 수사관으로 의심해 중정에서 자백한 간첩혐의를 녹음기처럼 반복했단다. 그의 유죄확정 당시 증거요지는 검찰에서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법정에서의 일부 진술이었다. 물적증거는 압수된 라디오 1대와 간첩 외삼촌에게서 받았다는 금반지 3돈이 전부였는데 라디오는 본래 김정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고 금반지는 김정인이 그의 처에게 사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는 논고문에서 김정인이 공소장에 기재된 사실을 모두 100% 자백하였음에도 한번 시인했던 사실을 합리적 근거없이 부인하고 한번 부인했던 사실도 검찰관이 추궁하면 다시 부인하는 ‘촌극을 자행한다’고 몰아붙였고, 그의 다급한 절규를 촌극으로 규정한 판사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정혜신, “판사님, 법대로만,,,” 한겨레 2005년 10월 11일)
사형이 확정된 뒤 김정인이 작성한 재심청구서는 일제 36년만큼의 시간이 지난 오늘 읽어도 피눈물이 난다. 문장도 엉망에 조사 ‘-을’과 ‘-를’도 구분이 안 되고 자기가 무슨 ‘좨’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잘못을 ‘니우치고’ 있는데 ‘채고형’은 ‘가하지(과하지)’않냐는 그의 호소는 묵살되었다. 당국은 친절하게도 김정인이 사형당하고 1년 쯤 지나 재심 기각 결정문을 받을 사람 없는 교도소로 배달해주었다고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기변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교육수준을 가진 사람을 흉악한 간첩으로 몰아 고문 호소도 묵살하고 사형을 내린 사람이 법사위원장이 되어 사법개혁으로 가는 길목에 재판거래는 없다는 예단을 갖고 “웃기고 앉아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 언론도 개혁에 일조하려면 역사적 시각, 거기까지는 안 돼도 여상규가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않는 최소한의 기억력을 갖고 악랄할 정도로 집요하게 한번 물면 놓지 않고 물고 늘어져야 한다. 한국의 언론이 이런 집요함을 갖지 못한 이유는 사법농단사태의 피해자들과 깊게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논평자는 감히 생각한다. 이들이 어떻게 고문당했는지, 빨갱이로 몰려 어떤 삶을 살아내야 했는지, 과거사 배상 판결이 뒤집히면서 받았던 돈을 토해내느라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사법농단으로 KTX 여승무원 재판이 뒤짚히며 불행히도 자살한 승무원의 딸은 어떻게 지내는지 한 번이라도 가봤으면,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으면 이런 문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면은 무수히 늘어났고, 기자는 무수히 많아졌는데 이런 기사는 오히려 보기 힘들어졌다.
10. 7월에 논의된 그밖의 사안들
(1) 흔들리는 최저시급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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