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장애인주일연합예배 공동설교문
입력 : 2007-04-06 05:02:08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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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KNCC 장애인주일 공동설교문
본문 : 누가복음 5장 17~26절/ 제목 : ‘그들의 믿음’/ 찬송 : 373, 278장
2006년 9월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등록 장애인 수는 총 1,934,515명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분명히 더 늘었을 것입니다. 미등록 장애인들과 법정 장애외의 현실적인 장애인들을 고려하면, 그 수는 상당히 늘어났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서너 집 건너 한 가정씩 장애인을 가족구성원으로 두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든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며,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만연한 장애에 대한 비하와 소외의 환경 속에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학식, 권력이나 지위가 아닌,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겼고,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땅에 현존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때 마침 한 뇌병변장애인을 네 명이 침상에 메어가지고 예수님에게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들었기에 그들은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기발하고 도전적인 생각으로 지붕에 올라 가 기와를 벗겨내고 뇌병변장애인을 침상 채로 예수님께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저희 믿음)을 보시고 뇌병변장애인의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 중 하나며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20절의 ‘그들의 믿음’입니다. 이 장면은 네 사람이 침상에 누운 뇌병변장애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데 당시 고대 이스라엘의 건축적인 장벽과 함께, 많은 무리로 인한 물리적 장벽으로 큰 어려움에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무리들의 열심이 분명히 귀한 것일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많은 무리들은 네 사람이 뇌병변장애인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데 결정적 장벽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서에서 저들은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는 교회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데 건축적인 장벽과 함께 사람들이, 곧 교인들이 장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그들의 믿음’은 헬라어로 ‘텐 피스틴 아우톤’(τὴν πίστιν αὐτῶν)으로 3인칭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네 사람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뇌병변장애인을 죄사하시고 치유하는데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만연한 장애이데올로기 중 하나는 장애인은 오직 장애인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 받을 수 있고 치유 받아야 한다는 믿음과 치유의 장애이데올로기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많은 장애인들을 치유해 주시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치유기사의 대부분은 사실 사람들의 믿음, 그것이 병자나 장애인 당사자건 아니면 주위의 어떤 사람의 믿음이건, 사람들의 믿음과 관계없이 전적으로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하반에도 보면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하여, 어떤 인간적인 계기보다도 전적으로 메시아적 능력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부분적으로 병자나 장애인 당사자의 믿음이 치유의 주요한 요소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주위 다른 사람의 믿음이 치유의 중요한 요소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서만 보더라도 8장 48절에는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을 때에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장 19절에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거하던 열 명의 한센병자를 고쳐주시자 그 중의 오직 한 사람, 곧 사마리아인만 돌아와 사례하자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 42절에는 여리고의 한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시고 예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복음의 오늘 본문과 함께 7장 9절에서는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8장 40~42절과 49~56절에서는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이 그의 딸을 다시 살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대부분 누군가의 믿음 없이 치유하셨지만, 때로 사람의 믿음을 근거로 치유하실 때는 병자나 장애인 당사자의 믿음에 근거할 때도 있었고, 주위 사람의 믿음에 기초할 때도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은연중에 만연되어 많은 상처를 일으키고 있는 믿음과 치유의 장애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여러 경우나 예외를 무시한 채 우리의 생각을 오직 하나, 곧 장애인 자신의 믿음으로만 치유 받는다는 생각으로 고착화시켜, 그 외의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당사자를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학자 낸시 레인(Nancy J. Lane)은 이것을 ‘희생양 신학’(victim theology)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치유 받지 못한 사람의 잘못을 그 사람의 믿음의 부족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어떤 병자나 장애인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고 할 때, 많은 교인들이 그것은 바로 병자나 장애인 자신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비난의 화살을 그 당사자에게 돌려서 그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신앙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치유가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가 오직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그 사고에 기초한 허위 신앙으로 인해 교회를 찾아 온 누군가의 상처를 더욱 심화시키고, 소외시켜 정죄하여 결국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질병과 장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가난과 실패, 어려운 형편과 당면한 난제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오히려 그런 비난과 정죄와는 반대로 주님의 사랑으로 안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나아가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열심히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병이 낫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많은 실패와 상처를 안고 있는 그 사람에게 또다시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화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의 본문처럼 침상을 메고 주께로 나온 네 사람의 믿음을 기억하면서, 그 주위에 있는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기에 아직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더욱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공동체며,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장애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키지만, 교회는 오히려 주님의 사랑으로 장애인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찬송가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의 3절 가사에는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라고 하면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2절 이하에 보면 “몸의 연약한 지체가 오히려 더 귀히 여김을 받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26절의 말씀대로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고통 받는 한 지체로 말미암아 모든 지체들이 함께 고통 받으며, 영광을 얻는 한 지체로 말미암아 모든 지체들이 함께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바로 ‘형제 자매공동체’임을 강조합니다.
목회자로서 병자나 장애인이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사자에게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모든 것을 도울 수 있으니 바로 당신의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어려움이 지속되는 것은 그 옛날 한 중풍병자를 메고 주님 앞으로 나온 네 사람과 같은 믿음을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 믿음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더 큰 관심과 사랑의 믿음을 촉구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그에 따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지 어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가 되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믿음이 없음을 탓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네 사람들은 분명히 뇌병변장애인을 잘 알고 그를 동정하고 돕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붕은 뜯어내기 쉬었다고 하지만, 복음서는 분명히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임을 전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지금도 지붕을 뜯어내는 것과 같은 결단과 도전과 모험을 시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위대한 일을 행하게 합니다. 믿음은 나를 구하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들의 믿음’은 한 뇌병변장애인을 회복시켰습니다. 그의 건강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게 하였으며, 사회 구성원으로 회복시켰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 죄 사함의 능력, 치유의 능력, 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 만약 그 외의 또 무엇이 있어 주님의 이런 능력을 나타내시는 데 한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사랑과 믿음으로 한 명의 뇌병변장애인을 주님께로 인도한 네 사람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장애인들에게 이 네 명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종교적 이기심에 가득 차 뇌병변장애인과 그를 돕고자 하는 네 명의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의 무리들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을 탓하지 않고 지붕을 뜯어 주님께로 인도하는 네 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네 명만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로 몰려온 모든 무리들의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작성자: 최대열 목사/ 명성교회 부목사, KNCC 장애인소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