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n (Above) - English (Below)
3월 5주
증언 1 '제주4·3에 대한 이해'
- 양성주(Yang Seongju), 제주4·3희생자유족회 사무처장
들어가며
70년 전 제주도민의 전체 인구의 약 10%인 3만 정도가 희생된 사건인 제주4.3이 어떻게 국민들이 전혀 모르게 되었을까?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은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표현했다. 제주4.3은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인다고 했었다.
제주도민에게 그 동안 제주4·3은 철저히 금기어였으면 자식에게 조차 보고, 경험한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부모들은 “속숨허라!”(조용히 입다물라는 제주어)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민주화가 되기 전 반세기 동안 제주4·3은 철저히 권력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진실된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4·3폭동이 발생하였다고만 교육을 했던 것이다.
2000년에 들어와서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진상보고서가 정부에 의해 발간되면서 그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국가추념일로 지정일로까지 지정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주4·3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해방된 제주
일제강점기 시대 제주는 일본의 왕래가 육지 가는 것보다 쉬웠다. 일본을 왕래하는 배편이 제주도를 전역을 돌면서 인력을 수송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면서 당시 인구가 20만 정도였는데 6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제주도 다시 돌아와 해방된 제주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제일 오래까지 존속하였고 미군정에서도 초기에는 존재를 인정하고 협력적이었다. 군정의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E.그랜트 미드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정이 친일, 우익세력을 앞세우면서 인민위원회와는 대립을 하게 된다.
해방후 제주도민의 일상의 생활은 상당히 고달팠다. 많은 인구가 일본에서 돌아왔으나 재산을 전혀 가지고 올 수 없었고 돌아온 고향에서는 일자리가 없었다. 생필품과 쌀이 모자라 물가가 폭등 하였는데 미군정의 대책은 전무하였다. 일제에서 관료로 있던 자들이 여전히 관료로 등용된 가운데 이들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경찰 모리배들은 도민의 불만을 더욱 가중 시켰다.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제주4·3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점이라 여겨진다. 해방이 되었으나 또다시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증폭된 불만은 3.1절 기념대회를 통해 분출하게 된다. 각 읍면에서 별도의 기념대회가 개최됨에도 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기념대회는 제주도에서 유래 없는 3만의 인파가 모여 ‘3.1정신 계승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국민학교에서 기념대회를 마치고 관덕정을 시위대가 거의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다친 아이를 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지나갔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항의하며 경찰을 쫓아갔고 경찰이 경찰서로 도망가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들이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판하고 발포한 것이다. 이 총격으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대부분이 등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봐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총상을 입은 사람 중에는 국민학생과 젖먹이 안고 있던 20대 여인도 포함되어 있다. 발포 사건은 분명히 경찰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다. 이에 제주도민의 민심이 들끓었다.
3.10총파업과 무자비한 탄압
폭발한 민심은 1947년 3월 10일 총파업에서 드러났다. 노동자,학생,통신기관,운송기관,공무원 심지어 경찰까지 전 도민의 90%가 파업에 동참하고 발포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한다. 당시 제주출신 박경훈 도지사는 모든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며 항의성 사퇴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미군정은 경찰의 책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탄압을 한다. 제주도민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억압하면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3.1대회 참가자 검거자 수는 한 달 만에 500여명이며 4.3봉기 이전까지 2,500여명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를 하면 탄압하였다.
박경훈 후임으로 유해진도지사가 오면서 서북청년회가 제주로 오게 되는데 제주도민들은 이들의 횡포로 치를 떨었다. 북한에서 토지개혁과 친일청산 과정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자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반감을 드러냈고, 경찰에 소속이 되었지만 급료가 없어 제주도민을 약탈하면서 생존을 하였다. 전 제주도민이 좌익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제주도민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연달아 고문을 받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도민 사회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남쪽만의 단독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인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내 경찰서, 서북청년회 및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이 발생한다. 비밀리에 운영 되던 조직이 노출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남로당제주도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대가 경찰과 서청의 폭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봉기를 한 것이다. “탄압이면 항쟁이다!”고 선언하며 제주도내 24개 경찰서 중 12개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 및 우익인사 14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때 무장대의 규모는 350명 정도이며 4.3 전 기간을 통해서 500명을 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무기는 일본식 소총 몇 정과 수류탄 몇 발 그리고 죽창이 전부였다.
미군정은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규정하였으나 당시 국방경비대는 사태의 본질은 제주도민과 경찰, 서청 사이의 충돌이라고 이해하고 개입을 꺼려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군은 사태 진압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9연대장인 김익렬 중령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해담을 성사시켜 협상에 의해 사태를 종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조작된 5월1일 오라리 방화사건에 의해 협상은 결렬된다. 오라리 방화 사건은 평화회담이 성사된 이후에 미군정이 무장대에 일어난 방화 사건인 것처럼 꾸민 것으로, 방화 장면을 촬영하여 제주도를 레드아일랜드라고 적극 홍보하였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김익렬연대장을 해임하고 박진경연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한다. 이후에는 강경진압에 의한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박진경은 미군정장관 딘 소장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는 과도한 진압을 거부하는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피살된다. 문상길 중위 등은 “민족의 반역자를 처형하였다” 법정진술하였다.
5.10 선거와 이승만정부수립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지역 3개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구에서 투표수 미달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정권은 자신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제주도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지시한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연대장을 포고령을 통해 “해안선 5km 이상에 대해 소개령을 내리고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을 무조건 사살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1월 17일 불법적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제주4·3사건 중에 발생한 대다수 희생자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는 어떤 재판도 근거도 없이 어린아이, 노약자, 부녀자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 전체 희생자 중 10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12%에 달하며, 여성의 비율의 21.3%에 달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과도한 진압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수치이다.
희생된 숫자도 엄청나지만 그 토벌과정에서 가족 중 사라진 사람이 있으면 대신 죽이는 대살을 하고, 부녀자에 대한 겁탈을 하는 등 자행된 야만적인 행위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49년 3월에는 무장대 세력이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게 되고 6월 7일에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사령관에 오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실질적인 제주4.3이 종결되는 듯했다.
예비검속과 수형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제주4·3의 비극은 재연된다. 육지에서는 보도연맹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예비검속하였고, 제주에서는 4.3사건으로 인해 재판을 받았거나 가족이 입산한 경우 등 요시찰 대상자에 대해 검속을 실시한다. 이로 인해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 된 인원은 1,120명이었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비행장 등에서 암살되었다. 또한 4.3사건으로 불법군사재판에 의해 전국 형무소로 끌려갔던 2,500여명도 전쟁 발발이후 행방불명되었으며 아직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규모
당시 제주도민 27만명 중 1/9에 해당하는 3만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로 공식 결정된 인원은 14,232명이며 이중 사망자는 10,245명, 행방불명 3,575명, 후유장애 164명, 생존수형인 248명이고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84.3%,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12.3%이다.
희생자 신고자 수가 예상 인원보다 적은 것은 가족 전체가 몰살된 경우도 많고 마을 전체가 희생된 경우도 있어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강요당한 침묵의 세월 50년
제주4·3사건은 철저하게 ‘공산주의에 의한 4.3폭동’이라고 50년 동안 규정되고 교육되어 왔다. 4.3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1948년 4월 3일에 무장봉기에 의해 파출소와 우익인사가 피습을 당했던 것을 근거로 무장대세력과 대다수 제주도민을 폭도로 매도하여 왔다.
피해가족과 4.3의 진실을 알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너무나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었던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에 조차 아무런 말씀도 할 수 없었고 기나긴 침묵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을 통해 4.3의 기점이 1948년 4월 3일이 아니고 1947년 3월 1일임을 천명하였고, 진상보고서를 통해 국가폭력에 의해 대다수 민간인의 희생된 사건임을 규정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불법재판으로 전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행방불명된 분들에 대한 진상규명, 유해발굴과 DNA분석을 통한 신원확인과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개별보상 등 해결과제들이 있으며 책임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주4·3사건의 이름은 아직도 명미정
제주4.3평화공원 전시관에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조형물이 백비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비석이 누워있다. 제주4·3은 보는 시각에 따라 ‘4.3폭동’‘4.3항쟁’‘4.3민주화운동’‘4.3통일운동’‘4.3학살사건’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하지만 처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격하게 대립하고 있어 정명을 하고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방 이후와 3.1발포 사건을 거쳐 저항했던 제주도민의 정신이 반영된 이름으로 명명 되어야 할 것이다.
- '한국교회 88선언 30주년 기념 국제협의회 '평화를 심고 희망을 선포하다' 자료집, 54~57쪽.
Witness 1, 'On the Jeju Incident'
- Mr. Yang Seongju, General Secretary, Jeju 4.3 Family
Introduction
How was it that the 70-year-old incident, the Jeju Incident that killed approximately 10% of the Jeju population, 30,000 people, was left completely unknown to the rest of the country?
Kim Seokbum, the author of ‘Hwasando’ translated this as the ‘self-slaughter of memories’. The Incident was not something to be spoken of and not something to be known. The terror-struck islanders forced themselves to completely rid their memories of the incident.
The incident was a taboo for the people in Jeju, and even their children were forbidden to hear or know of it. All parents would say was ‘Soksumhura!’, which meant to be quiet in Jeju.
For the past 50 years before Korea’s democratization, authorities distorted the truth behind the Jeju Incident and none were taught about the whole truth. All that was taught was that it was the Communists that led the ‘uprisings’ in Jeju.
The truth has begun to reveal since the 2000s when 4.3 special law (the Special Act on Jeju 4.3 Case Identification and Recovery of Victims) was enacted. In 2003, when the government issued a report on the truth of the incident, then did the public become aware of what happened. In 2014, the government designated April 3rd as a national Memorial Day, but still very few are well-informed about the Incident.
Jeju, Liberat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t was easier for the Jeju residents to travel to Japan than to mainland Korea. It was because ships from Japan navigated the Island to transport human labor. Jeju’s population was about 200,000 upon liberation but an extra 60,000 returned from Japan and took part in rebuilding the island. The People’s Congress in Jeju was the longest surviving in Korea. The US military showed efforts in the beginning to acknowledge the Congress. According to E. Grant Mead who worked as a security officer for the US military back then, the Jeju People’s Congress was the only existing party in the Island and in fact, the only existing government. But as time passed, the US military came into conflict with the Congress as it began to support the pro-Japanese and rightist groups.
Life in Jeju after liberation was hard. Many returned from Japan but returned with empty hands and many were left without jobs in their hometown. Inflation soared from lack of daily necessities and rice but the US military provided no countermeasures. Those who served as public officer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were re-appointed and therefore corruption was prevalent and the islanders were frustrated by frequent racketeering by the police.
March 1st Commemoration Shooting Incident
The March 1st (1919) Commemoration in 1947 is considered as an important starting point for the Jeju Incident. The growing resentment against the US military rule broke out during the March 1st Commemoration. Each village and town held their own separate Commemoration. In the North Elementary School, an unprecedented number of 30,000 participated and raised their voices to uphold the spirits of the March 1st day and fight for independence. After the Commemoration when the demonstrators were about to leave the Gwandeokjeong Pavilion, a child got hit by a horse hoof. The police who was riding the horse, however, simply did nothing and left. Enraged, the demonstrators threw rocks at the police and protest. Just when the policeman was making a run for his headquarters, there was gunfire. The police force from mainland Korea thought the demonstrators were attacking the police department and fired. Six died and eight were injured from the shots, and judging from the fact that most injuries were found on the back, the police probably shot those who were running away. Among the injured included an elementary school student and a woman in her twenties carrying her baby. The police were completely at fault for the shootings. And the people of Jeju were infuriated.
March 10 General Strike and Brutal Oppressions
The infuriated islanders went on a strike on March 10. Ninety percent (90%) of the population including workers, students, civil servants in the transportation and telecommunication department, and even the police requested punishment for the shootings. The then Jeju governor, Park Kyunghoon, took the blame and decided to resign from his position, protesting the shootings. The US military claimed the island as a ‘Communist Island’ and began oppressing the people. Rather than trying to resolve the issue, the US military decided to suppress the Islanders. In just a month, 500 people were arrested for participating in the March 1st Commemoration and by the April 3 Incident, approximately 2,500 were arrested.
Along with Governor Yoo Haejin, Park’s successor, the North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also came to Jeju. Their despotism was unbearable for the Islanders. The Association consisted of those who left North Korea when the government went under land reforms and drove pro-Japanese out of the country, and consequently, they heavily resented the North. Though they were part of the police force they received no wages, so they plundered the Islanders. Because the Association strongly believed that all the Jeju citizens were leftists, they killed people without any sense of guilt.
In March 1948, when three young men were taken to the police and died of excessive torture, the islanders could no longer tolerate the violence and cruelty.
Armed Uprisings in April 3, 1948
On April 3, 1948, about a month before South Korea was to hold an election under the United Nations, the Jeju South Labor Party led an attack on the police, the North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and the rightist headquarters. The Party initiated the attack for fear of having their secret organization exposed. The uprising’s main aim was to protest against the oppression and the coming up elections. As they shouted, “suppression provokes protest!”, they attacked twelve out of 24 police headquarters. Fourteen police and rightists died in the attack.
There were about 350 protesters, and from what we know about the events leading up to the April 3 Incident, the number did not exceed 500. Weapons used were limited to a small number of Japanese rifles, grenades, and bamboo spears.
While the US military saw the Incident as revolts by North-affiliated Communists, the National Defense Guard understood it as a conflict between the citizens and the police force and was reluctant to interfere. But under the US military rule, the Guards had no choice but to act.
Kim Ikleul, the then commander of the 9th regiment, wanted to resolve the issue peacefully through the negotiations with the commander of the armed demonstrators, Kim Dalsam, on April 28. But the talks failed when the US military framed the demonstrators for the May 1st Orari arson attack. In framing the demonstrators, the US military took pictures of the fire and publicly referred to Jeju as a red island. The US military fired Kim for not following suit and appointed Park Jinkyung, as his successor. Park deemed suppression as the solution. As a trusted official of Major General Dean of the US military, Park claimed that “it would be fine to sacrifice 30,000 Jeju citizens to suppress the armed demonstrators.” He was later assassinated by lieutenant Moon Sanggil who opposed excessive crackdowns. In court, he testified as to how “he executed the nation’s traitor.”
May 10 Elections and the Lee Seungman Government
On May 10, 1948, the elections to form a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failed only Jeju as two out of three electoral districts in Jeju failed to meet the number of vote designated by law . The Lee Seungman government which began its rule on August 15, 1948, regarded such as challenge against his legitimacy and began to suppress the Islanders.
On October 17, 1948, through Colonel Song Yochan, Lee Seungman issued a decree stating “an eviction would be issued for areas within 5km of the coast and anyone who enters the area would be killed.” On November 17, 1948, an illegal martial law was declared, which led to indiscriminate slaughtering. Most of the casualties that took place during the Jeju Incident were concentrated between the November 1948 and March 1949.
During this period, children, the elderly and women were killed indiscriminately without the support of any judicial or moral explanation. Children under 10 and elders above 60 made up 12% of the entire victim’s population and women made up 21.3%. The numbers clearly show how the people were killed regardless of gender and age.
Such numbers, however, do not show in full extent how cruel and barbaric the suppressions were – family members were killed for another family members who disappeared or joined the uprising, and there were also severe rapes. As of March 1949, the armed demonstrators were almost and completely eradicated and by June 7, Kim Dalsam along with his successor Lee Dukgoo were killed, putting an end to the Jeju Incident.
Preventive Custody and Convictions
The onset of the Korean War spurred back the tragedies of the Jeju Incident. In mainland Korea, those affiliated with the Federation Protecting and Guiding the Public (National Guidance Alliance) were taken into preventive custody. People who were blacklisted, such as those tried in the court for the Jeju Incident or had family members flee to mountains, were also taken into custody. 1,120 people were detained in Jeju’s four police stations and most of them were killed at sea or the military airports. Furthermore, about 2,500 people who joined the Jeju Incident were given jail sentences in illegal military trials. Since the Korean War they went missing, the truth on this has yet to be revealed.
Calculating Damage
Approximately a ninth of the 270,000 Jeju population back then was victimized by the Incident. Officially about 14,232 people suffered casualties and among them, 10,245 died, 3,575 went missing, 164 traumatized and 248 under a life sentence. 84.3% was killed by the punitive force and 12.3% from the armed forces. Official numbers are lower than the actual casualties because in cases where an entire family or town was wiped out, the numbers are hard to predict.
50 Years of Forced Silence
For the last 50 years, Jeju 4.3 has been defined and educated as a communist riot. As the date April 3 shows, the single day incident (when armed demonstrators attacked the police and the rightist headquarters) was used to wrongly accuse the demonstrators and the rest of the Jeju people.
Family members of victims and those who tried to reveal the truth of the Incident had to endure long periods of hardship, and the generation that was forced to keep the secret even from their children had to suffer great pain too.
When the Jeju 4.3 Special Law was enacted in 2000 it was declared that the start of the incident was not on April 3 in 1948 but rather on March 1 in 1947. It was further declared that the Incident was where many Jeju citizens were victimized by state violence. Consequently, President Roh apologized to the people of Jeju.
There are still many unsolved issues such as the truth about people who went missing after being imprisoned from illegal trials, finding the missing bodies and carrying out DNA identifications, and providing reparations for victims and their families. Lastly, inspections and punishment for those who committed crimes have not been carried out yet.
The Jeju Incident has yet to be properly named
The first sculpture one comes across when entering the Jeju 4.3 Peace Park’s exhibition center is a white monument. Nothing is written on it. Depending on how it is perceived, the Jeju Incident is called various names ranging from ‘April 3 Uprisings, April 3 Protests, April 3 Democratization, April 3 Unification movement, and April 3 Massacre’. Because positions markedly differ on the issue, the naming of the Incident is a difficult one.
The Incident should be named reflecting the spirits of the Jeju people who actively protested following Korea’s Liberation and the March 1 Commemoration Shootings.
- 'International Conference in Celebration of the 30th Anniversary of the 88 Declaration of the NCCK' pp7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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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지난 68회 정기총회에서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할 것”(시 34:14)을 다짐하고,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는 올해 2020년을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실현하는 “희년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희년운동의 일환으로 세계교회협의회 (WCC)와 함께 3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반도평화를 위한 세계기도운동”을 전개하오니, 이번 주부터 매주 보내드리는 기도문 (혹은 신앙간증문)을 가지고 교회와 가정, 직장과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 기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