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n (Above) - English (Below)
4월 1주
용서의 순간, 은혜의 순간[1]
- 서광선(David Suh)박사
서광선 박사는 남한과 북한이 분단 국가가 되기 전, 중국과의 북쪽 접경 지역인 강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목회자가 된 서박사의 아버지는 일제의 침략에 거침없이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일제 말,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서박사의 아버지는 “너는 제국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서박사를 일본 중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일본 학생들로 가득했던 교실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서박사는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이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슬퍼하는 가운데 서박사는 애써 기쁨을 숨겼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와 함께 독립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난 후, 서박사와 그의 가족은 고향인 강계로 돌아갔다. 1948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진 후 그의 아버지는 공산당 정권을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당시 공산당 정권에 협력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었고, 그의 아버지도 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면서 조그련의 적대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노골적인 언행은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고자 서박사의 가족은 더 남쪽인 평양으로 이동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미국과 소련이 남북에 진주한 뒤 5년 후, 1950년 6월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박사의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당시 19살이 되었던 서박사는 아버지의 소재와 안녕을 염려하는 동시에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그와 그의 동생은 집 마루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잠시 마루에서 나온 사이 징집기관에 붙들려갔지만 낯선 이의 도움으로 전장에서 죽을 뻔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마루 속이 답답해서 맑은 공기를 마시러 나온 사이 그는 군에 붙잡혔다. 트럭을 타고 신체검사장에 끌려가 군의관을 만나기 위한 줄에 섰는데, 놀랍게도 군의관이 “너 어디 아프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박사는 당시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설명하며,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네, 아픕니다.’라고 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군의관이 ‘아니, 너 아프다.’ 하면서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 의사는 난생처음 본 사람이고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군의관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쉬운 답을 찾자면, 하나님이 도우신 걸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서박사는 신체검사 줄을 떠나 걸어 나왔고 같이 붙잡혀온 남동생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은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저쪽으로 가야 돼. 우리, 전쟁에 끌려가게 되겠지.”라고 이야기했고, 서박사가 동생에게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보여주자 동생은 “그래,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동생을 보지 못했다. 서박사는 이 일을 통해 “왜 내가 여기에 있을까? 왜 나를 살리려고 이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까?”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서박사는 이 질문을 평생의 질문으로 삼아 겸손히 생각하고 긴 세월 기도하고 있다.
미국이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그의 가족은 드디어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강 강가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다른 네 명의 목사들과 한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한 아버지의 시신에는 총알 자국과 핏자국이 가득했고, 서박사는 아버지 시신을 안고 분노하며 강한 복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 후 서박사는 남으로 떠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해군에 입대했다. 입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미국 해군에서 만난 친구의 조언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서박사의 친구는 저녁을 함께 먹으며 다음 계획을 물었고, 서박사는 한국 해군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아니, 너는 해군 타입이 아니야. 학자 타입이야.”라고 말했고, 친구의 도움으로 서박사는 몬타나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들어갔다. 서박사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62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본회퍼의 옥중서한들을 읽고, 워싱턴에서 시민권 운동을 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듣고, 신학생 친구들이 시민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자신의 원수에 대한 태도와 복수에 대한 열망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하며 자신을 신학적으로 시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원수를 갚는 것과 용서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인권,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반공·친미주의의 이름으로 독재에 반대하는 노동자, 학생, 그리스도인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서박사는 “‘아버지는 공산 정권에 저항하여 싸웠고, 인권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북에서 순교하셨는데, 여기에는 소위 민주적 독재자가 있다 공산주의 독재자나 자본주의 독재자나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하며 모든 독재에 저항한 아버지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그때 서박사는 NCCK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게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며, 1980년 이화여대에서 해직 당한 뒤 지역의 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박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에 대한 참여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계기로 1991년 서박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모임에 NCCK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오랜 원수인 조그련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북측 대표단의 수장은 서박사와 같은 나이로, 아버지의 원수인 조그련 설립자의 아들이었다. 서박사와 조그련 대표는 둘 다 캐나다 교회와 정부 지도자들, 그리고 WCC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강연을 맡았다.
서박사는 당시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날 밤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남쪽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와서 평화를 말해야 합니다. 어떡합니까? 원수의 아들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데 다음날 아침 모임이 시작하기 직전에, 그 남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서박사님, 제가 하는 강연을 통역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통역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통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며 저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제가 통역을 도와주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어서 체포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만, 우리 대표들과 의논 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한국에서 함께 온 친한 대표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 돌아앉으면서 ‘그건 서박사가 알아서 해야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아무 도움도 안 되더군요!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복수냐 용서냐 그때 한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도와주기로 결심했고 강연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그의 강연이 끝나고 남쪽을 대표하여 내 강연을 발표했습니다. 북에 있는 적을 도왔으니 법에 걸리겠구나 싶었지만,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은혜의 순간, 원수를 사랑하게 하는 기회의 순간 같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자유롭게 북에 대해,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004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300명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며 이 이야기를 나눴고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조선 민족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와 자매로 하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 이 글은 서광선 박사(은퇴목사,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NCCK와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한 글로 협력선교사 커트 에스링거(Kurt Esslinger) 목사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인터뷰는 그리스도연합교회/제자교회 세계선교국 주최, NCCK 화해통일위원회 협력으로 인터넷세미나를 통해 방송되었다. 서광선 박사는 1931년 생으로 현재도 여전히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많은 공헌을 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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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ment of Forgiveness and a Moment of Grace[1]
- Dr. David Suh (Dr. Suh, Kwang Sun)
Dr. David Suh was born in the village of Kanggye near the northern border of Korea and China before North and South Korea became separate nations. His father became a pastor during the years Korea was occupied by the Japanese Empire. His father’s outspoken resistance to Japanese occupation put them in danger, so they moved to Manchuria closer to the edges of the Japanese empire. Dr. Suh’s father sent him to a Japanese middle school because he said, “You must learn the language of the empire.” He was attending school the day that empire fell, on August 15th, 1945. He was the only Korean in a class full of Japanese youth. He remembers the Japanese teacher calling the attention of the class to announce that the emperor had just surrendered to end World War II. While his classmates all expressed their grief, he had to hide his feelings of joy. He ran home to his father and celebrated openly with him.
After Japan left Korea, Dr. Suh and his family moved back to their home in the village of Kanggye. Eventually, as the south and north zones became two separate countries in 1948, his father then became outspoken against the communist leadership of the new North Korean administration. Some Christians were joining the communist administration and created the Korean Christian Federation (KCF), urging pastors like his father to join. His father refused, becoming an enemy of the KCF. Thus, the police of North Korea took a negative interest in his father’s outspokenness. Eventually they moved further south toward Pyongyang. Five years after Japan surrendered Korea to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war flared up again in June of 1950. Soon after the war began, Dr. Suh’s father went missing. While wondering who might have taken his father and what they might have done to him, Dr. Suh also had to worry about being picked up by the North Korean army himself and taken to fight in the war, since he was 19 years old in 1950. He and his younger brother would hide in a hole in the floor of his house. His ability to hide did not last forever; however, the kindness of a stranger saved him from likely death on the battlefield.
The North Korean army finally picked him up when the August heat of 1950 got so uncomfortable he had to get out for some fresh air. They trucked him into town and lined him up to see the doctor who was supposed to determine his physical fitness for the war. To his astonishment, the doctor told him, “You are sick.” He describes his response, “I don’t know what I was thinking at the time, of course I should have said, ‘Yes I am sick.’ Instead I argued with him, ‘No I am not sick, I am healthy.’ Thankfully, he insisted, ‘No, you are sick.’ He gave me a piece of paper that said I was not healthy enough to join the army. I didn’t know him, he was not a member of our church. To this day I still have no idea why he decided to do that for me. The easy answer would be to say it was God, I guess?” As he was heading away from the line of young men, he heard his little brother call out to him. The army had also found his little brother. His brother said to him, “Older brother, where are you going? You should be going in that [other] direction. We are supposed to go that way to the war.” Dr. Suh then showed his brother his medical release paper. His brother then responded, “Okay, older brother. You shouldn’t go to war. I will go to the army instead of you.” He hasn’t seen his little brother since that moment. Dr. Suh explains that these memories make him wonder, “Why am I here, then? What is my purpose if these people did so much to make sure I could survive?” He humbly muses that as old as he is and as many years as he has spent praying, he is still asking himself this question.
After the US won access to North Korea, his family was finally free to look for his father. Eventually they found him. Someone told him his father’s body was by the Taedong River in Pyongyang. He went looking, and sure enough he found a group of four other ministers who were executed and tied together. He found his father’s body covered in bullet holes and blood. Dr. Suh remembers the anger he felt as he held his father’s body, and he remembers the strong desire for revenge.
Dr. Suh then moved to the South. He joined the South Korean Navy as a way to avenge his father. He received another special opportunity when he scored highly on an entrance test. His results gained him access to a program that sent high performing Koreans to study in the US, and a friend he made in the US navy encouraged him to take it up. Near the end of his study at a US school, his friend had him over for dinner and asked him, “What are you going to do next?” Dr. Suh was planning on returning to the Korean navy at that time, but the friend suggested, “No, you are not the navy type. You are a scholar type.” His navy friend helped him return to the US and register for a Christian college in Montana. Dr. Suh went on to study theology and then earned admission to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 City in 1962. There he read Bonhoeffer’s letters from prison, he went to hear Martin Luther King Jr. speak of the Civil Rights Movement in Washington D.C., and he watched his friends and fellow students join in the Civil Rights Movement. He says that this time tested him theologically as he began to reflect on his own attitude toward his enemy and his desire for revenge. He began reflecting theologically on revenge, forgiveness, and “What should be my Christian attitude toward my enemies who killed my father?”
After receiving a PhD from Union Theological Seminary he returned to Korea and joined in the movement for human rights and democratization against the forces of South Korean dictatorship while teaching at Ewha University. At that time Park Jung-Hee, father of the recent former president Park Geun-Hye, was in power, and in the name of anti-communism and pro-USA rhetoric severely oppressed South Korean workers, students, and Christian intellectuals who opposed him. “I thought, ‘My father fought against the communist dictator and gave his life for human rights and democracy and freedom in North Korea, and here is this so-called democratic dictator…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 communist dictator and a capitalist dictator?’ So I should follow my father’s example against all dictatorship.” That is when he became involved with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Dr. Suh was eventually arrested by South Korean police for “agitating his students to demonstrate against Park Jung-Hee.” They forced him to resign his position at Ewha in 1980, which then freed him up to be ordained as a pastor of a local congregation. Despite the pressure from his government, he never ended his involvement in the Korean peace and unification issue.
This gave Dr. Suh the opportunity to join the NCCK for a consultation in Montreal, Canada in 1991 that included the KCF, his father’s old North Korean Christian enemies. There, the head of the North Korean delegation, who shared the same age as Dr. Suh, was the son of one of the founders of the KCF, his father’s main enemy. Both Dr. Suh and this representative of the KCF were set to speak before Canadian church and government leaders as well as representatives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He describes the encounter: “Then I really struggled the night before. Father, your son is here to talk about peace, and I’m representing South Korean Christians. What do I do? How can I meet this guy? But the following morning right before the meeting started, he came to me and said, ‘Dr. Suh, can you translate, interpret my speech?’ I said, ‘You have your own interpreter who came with you.’ He responded, ‘No, no, he is no [kind of] interpreter. His English is [not] good. He came here to watch me.’ But if I were to help him translate his speech that is a violation of South Korea’s National Security Law and I could get arrested. ‘Wait a minute, I have to talk with my friends from South Korea.’ I went to them to say that guy is asking me to translate his speech. And my friends, my really close friends turned away from me and said, ‘Hey that’s your business.’ What a help?!
“Then I made a decision…. Do I choose revenge or forgiveness? And then I heard a voice, ‘Loving your enemy is the real revenge.’ Okay, I will do that. So I helped him with translation. Then after him I did my own keynote address representing South Korea. After I did that, it was a small act, but violating South Korean law, helping my North Korean enemy, I felt a sense of freedom from the bondage of thoughts of doing bad things to my enemy. It was like a moment of grace, a chance for me to perform a loving action for my enemy. From then on I felt so free to talk about North Korea, peace, and reconciliation. In 2004 I had a chance to visit Pyongyang and give a sermon in front of a congregation of 300. There I told them about my story [this story], and in Pyongyang they all wept. They are Christians, they are Koreans, and they have the same feelings that I have for peace and unification. Now I am not only free on these issues, but also I have conviction that we may be united once again as brothers and sisters.”
[1] This story is a summary of an interview of Dr. David Suh (Korean: Suh, Kwang Sun), retired pastor and professor of Ewha University, done by Kurt Esslinger, pastor and mission co-worker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assigned to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The interview was broadcast as a webinar hosted by Global Ministries of the United Church of Christ/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 in cooperation with the NCCK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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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지난 68회 정기총회에서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할 것”(시 34:14)을 다짐하고,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는 올해 2020년을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실현하는 “희년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희년운동의 일환으로 세계교회협의회 (WCC)와 함께 3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반도평화를 위한 세계기도운동”을 전개하오니, 이번 주부터 매주 보내드리는 기도문 (혹은 신앙간증문)을 가지고 교회와 가정, 직장과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 기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